불과 년 전이지만 5, 6 그때는 조선 전폭(全幅) 안에 돌아다니는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申報)》하나뿐이었고, 잡지는 최남선의 간(幹)하는 《청춘(靑春)》이 있을 뿐이요, 조고계가 적료하여 지명하는 인사를 치자면, 2, 3 손가락을 꼽게 될 뿐이었었다. 5, 6년 내에는 수명이 짧으나, 그러나 각종의 잡지가 산출한 중 지금까지 유지하여 오는 잡지도 있으며, 신문이 또한 2, 3종이 되니 이를 가지고 남에게 비교할 수 없지만 다만 자가(自家)의 금석(今昔)을 대조하여 보면, 반도 문운이 거의 흑운(黑雲)을 헤치고 돋아오는 달과 같다 할 수 있다. 이제야 청년 재자(才子)가 글 쓸곳이 있지 않으냐.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