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이 한국 13도 내에 시서(詩書)를 말하고 공맹(孔孟)을 받드는 유림동포 제군아.
한국 본조 5백년래로 국민 중 제일위에 처하였던 자가 제군이 아닌가.
선비는 사민(四民)의 머리며 국가의 원기(元氣)라 하여 유림의 장석(丈席)이라 일컫는 사람은 군주도 감히 부르지 못하며 재상도 감히 벗하지 못하며 세족(勢族)이 감히 교만떨지 못하며 호리(豪吏)가 감히 겨루지 못하고 온나라 인심이 미연(靡然)히 그 하풍(下風)에 떨어져 모선생(某先生)이라 말하였으며, 성균관 유생이 어깨 위에 남루한 도포를 걸치고 겨울날 차디찬 구들에 벌벌 떨고 있는 기상이 보기에 매우 딱하니, 그가 어떤 권력이 있으리요마는 권당(捲堂)하여 재(齋)를 비우고 숭례문(崇禮門:南大門[남대문])에 나오면 임금께옵서 임금 의자에서 내려앉으신다는 미담도 있으니, 이로써조정에서 선비를 특별히 대우하는 예절을 대개 상상할 수 있다.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