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사적(史籍)을 『신지(神誌)』라 한다. 신지(神誌)를 혹은 인명이라 하며 혹은 서명이라 하나, 졸견으로는 신지는 본래 고대의 관명, 삼한사(三韓史)의 신지(臣智) 곧 ‘신치’니, 역대 ‘신치’의 ‘신수두’ 제일(祭日)의 치어(致語)를 모은 것이 있었던가 하니, 그 전서(全書)가 남아 있으면 혹 조선의 호머 시편이 될는 지도 모를 것이나, 불행히 신지의 것이라고는, 참 것인지 거짓 것인지도 모를 진단구변도(震壇九[局[국]]變圖)란 이름이 『대동운해(大東韻海)』에 보이며, ‘비사(秘詞)’10구가 『고려사』에 보이며, 그밖에는 유락된 1, 2구가 전할 뿐이요, 고구려의 국초의 『유기(留記)』100권이니, 이문진(李文眞)의 『신집(新集)』5권이니, 백제 고흥(高興)의 『서기(書記)』니, 신라
거칠부(居柒夫)의 『신라고사(新羅古事)』니 하는 것까지도, 그 서명만 우리 귀에 남아 전하고 그 1자가 인간에 유락하지 못하였다.
신채호는 젊은 시절 애국 계몽 운동가로서 주로 언론 저술 활동에 종사했고, 일제하에서는 러시아, 만주,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독립운동가로서 활약했다. 또한 사학자로서 한평생 ‘민족’과 ‘역사’를 화두로 당시 국정과 일본의 불의를 통렬히 비판하며 조선 민중의 혼을 깨우는 데 앞장섰다.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의 수많은 유적지들을 직접 돌아다니고 수많은 사료들을 접하면서 우리 고대사(고조선, 부여, 고구려)의 많은 부분이 왜곡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역사에 영혼이 있다면 처참해서 눈물을 뿌릴 것”이라고 통탄했다. 그가 민족 독립과 민중 해방을 위한 방편으로 아나키스트 운동에 투신하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있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엇갈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