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못하는 마음 것잡을길없어서 인숙은 발길을 어느편으 로 옴겨놓았으면 좋을지 몰랐다. 지난날의 모-든 것을 깨끗 이 청산하고 신변의 루(累)를 훌훌 털어버리고나니 (아아 인제는 천상천하에 나한몸뿐이로구나!) 하는 외침이 저절로 입밖을 새여 나오는동시에 날을것처럼 제몸이 가볍고 홀가분한 것이 느껴젔다. 그러나 인숙은 그 다지도 목마르게 바라던 자유를 얻고보니 어둡고 갑갑한 조 롱속을 벗어나기는 했어도 쭉지 떨어진 새처럼 넓은 천지에 어느편으로 날러야 할지 헤매이지 않을수없고 회호리바람에 떨어진 도토리 같기도 하여서 외톨로 어디를 굴러야 할지 난감하였다.
삼청동으로 올라가기고 싫고 봉희를 찾자니 내외가 다 집 에 없을때요 그렇다고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허의사를 찾아가서 리혼수속을 하고 오는길이라고 보고를 하기도 싫 였다.
그는 내키지않는 걸음거리로 '전동'으로 들어서 맥없이 걷 자니 '수송동' 골목으로부터
"동동 당당 도드랑 동당"
하고 피아노소리가 들렸다. 자못 유쾌한 행진곡은 골목안 의 유치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