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은 방으로 들어와서 넉줄밖에 아니되는 편지사연을 두 번 세 번 읽어보았다.
"인제와서 이따위 소리를......"
하고 혼자 부르짖고는 편지를 방바닥에 내어던젔다. 될 수 있는대로 흥분하지 않으려하며
"제자식으로 인정할 수가 없다구?"
"부부관계까지 청산을 할 각오를 하라구?"
하고 입속으로 뇌까리다가
"흥, 마음대로 해보라지"
하고 천장을 쳐다보았다. 강보배ㄴ가 하는 계집과 살지를 못해서 핑계할게 없으니까 멀정한 저의씨를 남의자식이니 책임을 질수가 없다고 하는 심사가 오륙월 장마통에 썩어 문드러진 생선 배바닥같아서 인숙은 그편지에 침을 탁 배았 고 싶었다.
그나마 다른 리유를 붙인다면 모르거니와 저를 모함하는 것은 둘재요 세상밖에 나온지 얼마안되는 조그만 생명에게 까지 누명을 씨워가지고 리혼을 하자는 심ㅅ보가 어찌나 비 열한지 더러운 것을 보고 꾸짖는 것 같아서 분개할 가치도 없을것같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