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럭저럭 여름이 지나고 가을 철로 접어 들었다. 인숙은 고만 되는대로 되어라 하는 태도로 학과복습과 바누질판에 박은듯한 무료하고 고달픈 생활을 계속하였다. 찾어와서 오 해를 풀겠다든 남편은 그뒤로도 그림자쪼차 비치지않고 배 는 다달이 불러와서 오일무명으로 아무리 졸라매어도 남의 눈에 띠울만치나 뚱뚱해졌다.
(내가 무슨 음행을 했나. 숨길게 뭐냐) 하고 동급생들이
"이인숙이가 아이를 배었대"
는 소문을 퍼트려도
"애밴 사람은 공부못하나"
하고 천상천하에 부끄러운 것이 없다는 듯이 천연 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교장이나 선생들은 인숙의 사정을 대강 짐 작하는 터이라 조금도 그들앞에 머리를 들지 못할 까닭은 없어도 나이 어린 학생들이 놀리는 것은 듣기가 싫였다. 그 렇것만 (몇달아니면 졸업을 할걸) 하고 참고 지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