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햇빛이 풀솜을 둔 저고리를 입은것만치나 등어리를 폭온히 나려쪼이는 오후였다. 한강 인도교 아래에는 작난감 같은 낙거루가 단물생선의 비눌처럼 가벼운 바람에 잔물결 이 잡히는 강우에 네댓척이나 떠서 등싯거린다. 노들강변에 길로 솟은 버드나무 그늘로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펜키'칠 을 새로한 뽀-트가 두어척 오리처럼 쌍을 지어 연두빛 신록 에 물들은 물우를 헤치며 돌아다니는 것은 고대로 한폭의 수채화다.
"엣샤 엣샤"
바람결에 불려오는 기운찬 소리에 삼개( )편짝으로 고개를 돌리면 힌 운동모자를 쓴 학생들이 기다란 경주용뽀-트를 웃적 웃적 저어 강한복판을 한일ㅅ(一)자로 가르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온다. '엣샤'소리와 함께 거리마의 발처럼 일 제히 폈다 옴으렸다하는 '오-ㄹ'( )에서는 물찬 제비의 날개 모양으로 물방울이 뚝뚝 덧는다. 오월의 태양은 씩씩한 청 춘들의 건강을 축복해주는 듯 그네들의 머리우에서 빙긋이 웃는 듯.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