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은 그동안 저의 일로 며칠을 두고 구석구석이 비밀회 의가 열린줄을 깜앟게 몰랐었다. 봉희는 인숙이와 창자를 마주 이은것처럼 단짝으로 지낸다고 해서 절대로 알리지 않 기로하고 어른들끼리만 숙덕 공론을 하였다.
인숙의 흠을 잡어 생트집이라도 하지를 못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든 과붓댁이, 제옷에 묻어온 이상한 편지-'본처와는 리혼까지 한뒤에 당신과 결혼을 하겠다는 의미의 괴문서(怪 文書)를 발견하고도 이제까지 참고 있었든 것이 도리어 이 상한 일이었다.
"온 이런 망칙한 일이 세상에 있나. 남편이 류학을 간사이 에 이따위 편지를 받고 보물처럼 감춰뒀으니 내원 뒷문박 골목속에서 어떤 학생 허구 몰래 만나서 숙은 거리는때부터 수상하드라"
하고 제남편의 성묘를 인력거로 들어오든날 저녁에 어느 크다란 학생과 밀회를 하다가 들키든 생각을 하였다.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있어요? 글세 이 편지를 좀보서요"
하고 큰동서에게 몰래 그편지를 보였다. 큰동서는 속으로 놀라면서도
"아마 학교에 댕길 때 어떤놈이 작난을 헌게지. 여보게 자 네헌테두 두지말구 찢어버리게 그 얌전헌 사람이 설마 외간 남자허구 편지질이야 했겠나"
하고 처음에는 그런 것을 들추어 내어가지고 자기에게 까 지 보이는 동서의 경솔한 것을 나물 하듯하고 고지를 듣지 않었다. 그러나 과부댁은
"형님두, 새침덕이가 골로빠지는줄은 몰으시는 군요. 내눈 으로 똑바루 본게 있는데다가 이런 증거까지 들어났으니깐 형님께 먼저 의론을 허는거야요. 정말 그댁이 그런짓을 하 는줄 알구서야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이런 집안에서 그 런 창피한 일이 생겼으니 우리 얼굴에도 똥칠을 한게 아니 야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