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못가봐서 얼마나 섭섭했우?"
인숙은 누구보다 먼저 나와마지며 웃으면서 봉희의 졸업장 을 받어들었다. 그러나 그우슴은 억지로 짓는 부자연한 우 슴이었다.
봉희는 잠잫고 아버지가 누은 방으로 들어갔다. 채수염에 신수가 조키로 유명하든 아버지는 딴 사람처럼 얼굴이 변하 였다. 보기 흉하게 삐뚤어진 입모습을 따러, 반백도 더된 기 다린 알엣 수염은 가을바람에 불려서 이리저리 얼크러진 시 들은 잔디풀 같다고 할가. 더구나 왼편 팔과다리에 힘쭐이 풀리고 감각을 잃어서 죽은 사람의 수족과같이 척 느러트리 고 어머니에게 상반체를 기대고 누은 아버지의 모양! 넘우 나 비참하게도 변한 아버지를 한참이나 말없이 나려다 보는 딸의 눈에는 눈물이 괴였다. 무슨 까닭으로 반신불수까지 되었는지 그 리유를 방바닥에 방울 방울 떨어지는 눈물은 어제까지 느껴보지 못하든 골육의 지정에서 울어 나는 효심 의 결정이었다.
(나 때문에 아버지가 저모양이 되섰구나) (저러다 세상을 떠나시면 내가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것 이 아닌가) 이러한 생각이 들자 봉희는 모든 불행의 전책임이 저에게 있는 듯 비극의 주인공인 아버지의 얼굴을 바로 볼수도 없 거니와 아버지만치나 절망을 하고 등신같이 남편을 붙들고 앉인 어머니의 얼굴도 참아 마주 볼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손등으로 눈을 부비고 선 딸을 한참이나 물끄럼 이 처다보더니 무어라고 입속으로 중얼거리듯 한다. 봉희는 그 말을 알어 들을수가 없어서 코소리를 내어
"네?"
하고 알옛목으로 귀를 기우렸다. 어머니는
"어떤 말슴은 당최 알어들을수가 없단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