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공일날 오후였다. 봉희는 동무집으로 놀러간다고 교 복으로 갈어입으려는데
"별당마님께서 자근아씨를 잠간 올러오라 십니다"
하고 허리꼬부라진 안짬재기가 나려와서 일르고는
"좋은일이 있으니 양복은 벗구 조선옷을 곱게 입구오세요"
하고 얼굴에 주름을 잡으며 저혼자 웃고 돌아선다.
"할머니가 왜 나를 불으셔? 누가 왔어?"
하고 봉희는 교보을 버서 던지고 치마저고리로 갈어 입었 다. 봉희는 이틀에 한번이나 사흘에 한번, 그것도 마음이 내 켜야 할머니에게 문안을 하였다. 할머니는 정말 연화대로 갈날이 멀비 않었는지 앉어서도 염불이요 누어서도 염불이 다. 사바세계와 가족까지도 잊어버린 듯이 거들떠보지도 않 고 나무아미타불만 불으고 지내든터에 무슨일로 오늘은 손 녀를 불으는지, 봉희는 매우 궁금해서 별당으로 올러갔다.
별당댓돌에는 여자의 신이두어켜레나 노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