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은 고독과 번민속에 싸여서 그날 그날을 보냈다. 장근 두달동안이나 남편에게서는 엽서 한장 오지아니하고 간신 간신히 변통해보내는 학비를 받고도 받었다는 회답조차 없 었다. 궁금한것을 참대못해서 쓰지않으러든 편지를 길게 쓰 고 탈없이 지낸다는 소식이나 전해서 안심을 시켜달라고 애 원을 하다싶이 해서 붙였건만 그역시 꿩구어 먹은 자리었 다. 돈이나 편지가 되돌아 오지 않는것을 보면 받는 사람이 있는것만은 분명한데 (그 계집때문에 나까지 영영 잊어버렸나? 모든것을 알고도 모르는체 허구 있는 내가 무얼잘못했길래햇 편지답장까지 안헐까?) 하니 무한히 섭섭한것을 지나처, 어느 정도까지 반감이 생 길지경이었다. 그러나 기다리지도 않고 긴치도 않은 장발에 게서는 한주일에 한번씩이나 편지가 왔다. 처음에는 봉희에 게 애틋한 사랑를 고백하고
『나는 가을날 황혼의 쓰르래미와 같이 봉희씨의 이름을 부르며 나홀로 애를 태우다가 죽겠소이다. 몇번이나 나의 정성을 다한 긴 글월을 보내도 종무소식이니 봉희씨의 너무 나 냉정한 태도에 내몸이 얼어붙는것 같습니다.』
하고 배달중증으로 까지 편지질을 하더니, 봉희가 제편지 를 뜯어보짇 않고 찢어서 코를 풀어 버리는것을 보기나 한 듯이
『당신의「지리가미」가 되어버리는 나의 필적을 조상합니 다. 그러나 기억해 두십시요 오는 봄방학에는 돌아가는대로 본처와 민적상으로 까지 깨끗이 리혼을 하고 나서 당신과 정식으로 약혼을 하고야 말 작정입니다』
하고 대단한 결심을 보였다. 그래도 봉희는 장발의 등기편 지를 받을때마다 인제는 찌어버리기도 수고스러운듯이
『온 별 추근추근 헌 녀석을 다보겠네 얘 체신국부조는 작 작 해둬라』
하고 겉봉도 아니뜯고 방바닥에 책상우에 아무데나 팽개를 첬다. 그러나 그편지는 봉희가 나간 사이에 인숙이가 뜯어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