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며츨동안 인숙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아모 경이 없이 지냈다. 만사가 도시 귀찮어서 (학교엔 기를 쓰고 단기면 뭘해) 하면서도 전과같이 가지 않을수는 없었다. 공부를 계속할 생각보다도 학교에 가서 여러 학생이 북적 거리고 떠드는 틈에 끼여 수업시간에 칠판을 처다보고 필기를 하는 동안만 은 모든 생각과 고통을 잊을수가 있기 때문이다.
봉환에게 복순의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체 하기 위해서 편지도 하지않었다.
그러나 장발이란 위인이 술덤벙 물넘벙으로 주책이 하나토 없어 보이는 데그사람이 귀둥대둥전한말 만들고 철석같이 믿어야할 남편을 의심하는것은 넘우나 경솔한것도 같고 (정말 입원을 헌걸 가지고 그렇게 지렛짐작을 했으면 마른 날 벼락을 맞어두 싸지) 하는 사실에 더욱이 마음이 괴로웠다.
용환은 저의 승락이 없이 소절수를 내어 놓았다고 청직이 를 몰아 세었다.
『병이 무습 병이야. 딴짓을 허누라구 그러는게지. 제가 나 까지 속일녀구』
하고는 저역시 동경 유학 시대에『카페-』의 여급에게 홀 짝 반해서 그때도 겨울인데 친구와 외투까지 말끔 도적을 맞었다고 전보질을 해서 한목 삼백원이나 들여다가 그 게집 을 데리고 하꼬네(箱根) 어느 온천에서 열흘이나 묵고온 경 험이 있었다. 그래서 아우가 입원을 했다는것이 새빩안 거 짓말인줄 알어 차리고
『재가 보내라기전엔 한푼이래두 보내선 안돼』
하고 청직이에게 단단히 일렀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