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츰이 되자 인숙은
『학교를 사흘씩이나 빠지면 어떡허우. 더군다나 시험땐 데』
하고 책보를 싸는것을
『설마 낙제야 시기겠우. 제발 오늘 하루만 더조리를 해 요』
하고 봉희가 쌈싸우듯 하며 구두까지 갖다가 감추었다.
『그럼 이 이불 꿈여논걸 어떻게 전하면 좋다우?』
장발이 집으루 갖다 줘야 헐텐데 암만 적게 싸두 저렇게 부피가 큰걸 복순이더러 수고를 해달라기는 염치가 없 구……』
하고 인숙은 한 걱정을 하더니
『참 장발이 집이『체부동』몇번지랬지? 한번 들었것만 깜 박 잊어버렸구려』
하고 양미간을 찝흐리며 장을더듬는다. 봉희는 변또를 책 보에다 사들고 나가면서
『나두 번짓수는 잊어버렸는데 저어 체부동으로 들러가자 면 바른손편짝으로 수통박이끌목이 있지안우? 바루 그골목 안 막다른집인데 싸전에 물어봐도 안답디다』
인숙은 우슴을 띠우며『자근아씨 언제 그집에 가봤우?한 다. 봉희는 『아이망직해라. 내가 뭣허러 장발이집엘 차저간 단말요? 접때작구만 저의집으로 놀러오라구 두번세번 일너 주고가서 생각이 나길네 아르켜주니깐』
하고 눈을살짝 흘겨보이고는 외투자락을 여미며 나갔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