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후 한 삼년동안 두 젊은 내외는 원앙새 부럽지않게 지냈 다. 인숙에게도 더 바랄수 없이 행복한 세월이 흘렀다. 이 세상에서 다만 하나인 제 남편은 저의 품안에 안겨 있지 않 은가 이제 와서는 지난 일이 한바탕 꾸어버린 꿈의 자취와 같은뿐. 오즉 저 한사람에게 애정을 쏟고 있지않은가.
인숙은 하늘이 두쪽에 갈러지는 한이 있드래도 다시는 봉 환을 놓칠리가 없다는 자신이 단단히 생길만치 봉환도 인숙 이 이외의 여자에게는 한눈도 팔지 않었다.
조모의 신칙이 엄할수록 서로 이구석 저구석으로 피해 다 니며 도적잠까지 자다가 들커서 며칠씩 얼굴을 들지 못할때 도 있었다.
오즉 청춘의 기쁨을 단돌이서만 독차지 한듯이 집안 사람 들에게 너무 유난스럽게두 군다고 흉을 잡할만치 금술이 좋게 지 냈다. 원체 변덕스럽고 거염이 많은 둘째 동서는
『흥 두구 보지. 그러다간 또 내꼴이 될걸』
하고 속으로 빈정거렸다. 끝에 동서가 의초좋게 지내는것 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부모가 저의 내외에게만 심 하게 구는것 같어서 그 반동심으로 동서의 내외의 흉을 보 고 대사롭지 않은 일에도 입을 삐죽어리며 헐뜯는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