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림의 목숨은 시각을 다투었다. 경직이가 귀국한후 조금 생기가 나서 딸의 혼인을 보살펴주든 그는 또다시 집과 발 을 끓은 아들때문에 병이 났다. 경직이가 서울서 노는 계집 을 얻어가지고 셋방 살님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뿐아 니라 고조와 오대조의 산소가 있는 여주(麗州) 땅의 이만평 이나 되는 산림을 가도장을 해서 팔어먹은것이 묘직이의 입 으로 탄로가 났다. 또한편으로는 고리대금업자가 격일해 와 서 서투른 조선말로
『리자도 그저 내지 않으니 들어있는 집과 세간까지 차압 할테요』
하고 위협을 하였다. 그러나 한림은 다시 다른곳에 빗을 얻을 도리가 없었다. 이래저래 한림은 울홧병이 폭발하였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