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이튼날부터 인숙의 시집살이는 시작되였다. 일은아침 전 깃불이 나가기전부터 일어나 세수를하고 분을 바르고 유모 가 머리를빗겨 쪽저주면 족도리를 쓰고 긴 치마를 늘이고는 시중 조모로부터 시조모 시아버지 시어머니에게 차례차례 문안을 들인다. 지밀로 별당으로 산정으로 유모와 안짬재기 의 후의로 드나들며 그네들이 기침하기를 기다려 절을하고 한참씩이나 문밖에 시림을 헌다.
그네들은 자고 일어나는 것이 일정한 시간이 있는것이 아 니라 반신불수인 시중모는 새벽부터 깨여서
『새아씨 잘 주무섰나 가보아라』
하고 한 집안에서 전갈하님을 내보낸다. 시이버지는 산성 에서 친구들과 밤늦도록 바둑을 두거나 술상을 버리다가 새 벽녁에야 취침하면 이튼날 오정때나 되여야 상노가 침방의 덧문을 연다 인숙이는 그때까지 아침을 못먹고 족도리를 쓴채 기다렸다 가 문안을 들려야만한다. 조반상을 벌녀노코도 한시간 동안 이나 느리잡고 떠 넣어야만먹는 증조모가 상을 몰릴때까지 장지밖에 꼿꽂이서야한다. 그다음은 시할머니의 밥상머리로 움겨가서 시중을들고 다음차례로 거진 점심때에야 아침상을 받는 시아버지의 식사가 끝이날때까지 꼼짝못하고 기다려야 하는 법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