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숙이가 바느질을 배우고 음식 만드는법과 큰일 치르는 절차를 견습하고 한편으로는 규감(閨鑑)이니 내측(內則)이니 열녀전(烈女傳)이니 하는 책을 읽어 시집갈 준비를 허는동안 에 서월은 꿈결같이 흘렀다.
그동안 한림의 집은 집웅에 이끼(苔)가 더 끼어 덕개가 앉 고 기왓장 틈을 비집고 돋아난 잡초만 욱어젔다 시들었다 하야 해를 거듭할사록 집이 점점 후락해갈뿐 인숙의 신변에 는 별로 큰변화는 없었다.
사오년이나 두고 온세계가 들끓고든 구주대전(歐洲大戰)의 피비린내 나는 비바람도 한림의 집에는 무풍지대(無風地帶) 와 같이 조고만 여파도 끼치지 않었고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해하는 세태와 조선의 환경에서도 몇만리나 떠러진듯 한림의집만은 대낮에 닭우는 소리를 듣는듯한 한 가 롭고 평화스러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이삼년전부터 한림의 집에도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 다. 이집에 주춧돌이요 기둥이라고 할만한 외아들인 경직이 가 부모와 처자를(그는 그동안 딸을 하나낳었다.) 버리고 돌 연히 집을 떠났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썼다. <상록수>는 그의 대표작이다.
1925년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 역을 대역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으며,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가 이듬해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1926년 〈동아일보〉에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정식으로 영화를 공부했으며, 6개월 후에 돌아와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각색·감독해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1935년 장편 〈상록수〉가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자 이때 받은 상금으로 상록학원을 설립했으며, 1936년 〈상록수〉를 직접 각색·감독해 영화로 만들려고 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