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8월 4일(금) 우(雨). 오전 9시에 경성역을 떠나 남향. 출판법 저촉에 관한 사건과 일기 불순의 관계 등으로 예정보다 늦게 떠나게 되니 초심(焦心)이 불일(不一)하다. 조치원 승환(乘換)하고 충북선 종점인 충주에 하차하니 오후 4시경. S군 외 수삼(數三) 양정 교우를 만나는 일과 임진란 사적을 찾고자 함이다. 우중에 자동차를 몰아 시외 5리쯤에 신림 장군이 배수의 진을 쳤던 탄금대를 견학하니, 그 지형은 권율 도원수의 진지였던 행주 덕양산에 방불하다. 반도의 중앙을 표시하는 중앙탑과 장군 임경업의 충열을 기념하는 단월대는 멀리서 지점(指點)할 뿐으로 일몰을 한(恨)하면서 각각 증수(增水)하는 달천을 건너다. 충주를 중심한 연초(煙草)의 연산액(年産額)이 200만 원(100만 관〔貫〕) 에 달하여 북에 개성 인삼, 남에 충주 연초로 2대 특산물이대립적으로 발전된다 함은 처음 듣는 교재(敎材)이다. 지력(地歷) 풍정(風情)에 관한 귀중한 설화를 들으면서 충주 분지의 일야(一夜)를 지내다.
순수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수립하고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주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 독립에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니던 중,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일본 무교회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 일원이 되면서 신앙적 토대를 쌓아 갔다. 1927년 귀국,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월간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1930년 6월부터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성서연구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