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무라 선생은 무교회주의의 창도자(唱導者)이니 ‘우치무라 씨에게서 만일 무교회주의를 빼면 그것은 고자 우치무라가 된다’고 무교회주의의 권화(權化)로 보는 이도 있고, 우치무라 선생은 무사의 자손이니 기독교적 성도(聖徒)라기보다 ‘영계의 군국주의자라 호시탐탐으로 조선 반도의 영계에 침입하고자하는 자라’고 만평한 이도 있고, 그 밖에 귀족적 인물이라느니, 난신역적(亂臣逆賊)이라느니, 위선자라느니 하여 보는 눈이 다를수록 인식도 달랐으나 우리로서 총괄하여 말하라면 이런 이들의 관찰은 모조리 장님의 코끼리 관찰에 불과하다. 관찰이 그릇되었다기보다 오직 그 일부분씩을 보았을 뿐이다.
순수한 ‘조선산 그리스도교’를 수립하고 교회에 매달린 교조적 신앙이 아닌 조선민족의 그리스도교를 뿌리내리는 무교회주의 신앙을 주장했다. 그의 신앙은 개인적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조선인 그리스도교도로서 시대의식을 명확히 지니고 조선민족의 구제와 조국 독립에까지 확대되었다.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다니던 중, 동양선교회 성서학원 학생의 노방전도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접했다. 일본 무교회운동을 창시한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성서연구회 일원이 되면서 신앙적 토대를 쌓아 갔다. 1927년 귀국,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민족주의적 교육을 일관했다. 월간 종교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고 1930년 6월부터 가정집회 형식으로 약 10년간 성서연구회를 주도했다. 창씨개명,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동포들에게 그리스도교의 참된 정신과 독립정신을 계몽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1945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