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빨래터에 쫓아다닌 듯하나 이렇다 하고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자취는 없습니다. 좀 자라선 공부하러 뛰어다니기에 가정일에는 전연히 손도 대어보지 않았습니다.
이십여 세에 나는 출가를 하였습니다. 음식도 바느질도 빨래 같은 것도 할 줄 모르는 것이 가정에 들어앉아 놓으니 이 위에 더 가깝하고 안타까울 데는 없는 듯합니다. 연애시기를 지나 결혼기에 들어온 남편은 왜 그다지도 쌀쌀하고 냉정합니까. 참말 눈물겨운 일입니다. 더구나 남편은 구여성을 전 아내로 가졌더니 만큼 그의 눈에 비치는 나는 아마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양입니다. 나는 거의 날마다 남편과 싸움을 하고 친가로 간다고 보따리를 싸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뜻 그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나의 이성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과 날마다 쌈하게 되는 이유를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가정일에 서툴러서 그러한 듯하였습니다. 그 후 나는 적으나마 가정일에 충실해야 할 것을 깊이 깨닫고 몸을 아끼지 않고 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 돈을 훔치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녔던 보통학교 때의 생활은 그런 그녀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어린시절 궁핍했던 삶은 강경애가 가난한 대중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20년대의 문단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립을 목표로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30년대의 문단은 작가들에게 대중을 선동하는 무기로서 △대공장 파업 △소작쟁의 △동맹 결성 등의 제제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할 것을 요구했다. 강경애의 작품 역시 시대적 현상과 맞물려 당시의 투쟁경향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