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을 떠난 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 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 것이다. 시가지가 좀더 번화했을 것이라든지 사릿골[四里洞[사리 동]], 오릿골[五里洞[오리 동]]에 빈민이 그 수를 더했을 것이라든지…… 더구나 이웃에서 주소로 대하던 맘 좋던 할머님들이며, 자루 같은 젖통을 휘두르면서 입에 침기가 없이 아기자랑으로만 일을 삼는 젊은 부인들이며, 아리랑타령을 제법 멋들게 부르며 우리집 앞으로 지나다니던 나무하는 아이들까지도 내가 이제 고향에 가면 만나보지 못할 얼굴들이며 알아보지 못할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항상 바라보고 위안을 얻으며 격려를 받던 그 하늘만은 의연할 것을 머리에 그리며 나는 이 붓을 옮긴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 돈을 훔치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녔던 보통학교 때의 생활은 그런 그녀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어린시절 궁핍했던 삶은 강경애가 가난한 대중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20년대의 문단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립을 목표로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30년대의 문단은 작가들에게 대중을 선동하는 무기로서 △대공장 파업 △소작쟁의 △동맹 결성 등의 제제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할 것을 요구했다. 강경애의 작품 역시 시대적 현상과 맞물려 당시의 투쟁경향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