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밤에 쓰신 선생님의 친필은 오늘 반갑게 받았습니다. 묵직한 봉투이 매 처음에는 다소 의아한 생각으로 봉투를 뜯었사오나 의외에도 선생님께서 보내주시는 장문 편지이매 얼마나 기쁘고 반가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번 세번 거듭 읽었나이다.
선생님 매야(每夜) 10시에 주무시는 정한 시간임에도 불구하시고 그 밤이 깊도록 주무시지 않고 저의 졸작을 읽으셨다고요? 황공하옵니다. 이것은 저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지나치는 영광이옵니다. 더구나 피곤하신 몸으로 저의 부족한 작품을 일일이 평까지 하여주셨사오니 이 위에 더 죄송하며 기쁜 일이 있사오리까. 그러나 선생님, 습작에 지나지 않는 저의 작품을 가지시고 이렇게까지 과찬하여 주심에는 다소 불안함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미 보신 바와 같이 그 문장의 미숙함이며 구상의 미흡함이란 얼마나 유치합니까? 저의 얼굴이 붉어짐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선생님의 기대하시는 뜻에 어그러짐이 없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 돈을 훔치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녔던 보통학교 때의 생활은 그런 그녀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어린시절 궁핍했던 삶은 강경애가 가난한 대중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20년대의 문단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립을 목표로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30년대의 문단은 작가들에게 대중을 선동하는 무기로서 △대공장 파업 △소작쟁의 △동맹 결성 등의 제제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할 것을 요구했다. 강경애의 작품 역시 시대적 현상과 맞물려 당시의 투쟁경향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