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하여 신병에 특별한 효과를 얻지 못한 나는 6월 중순에 일로(一路) 삼방(三防)으로 보따리를 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내가 이 삼방 협(三防峽)에 짐을 푼 지도 벌써 10여 일이 넘었는데 문득 『인문평론(人文評論)』에서 부탁한 원고가 생각나서 이에 붓을 들기로 하였다.
최근 3년째 신병으로 인하여 나는 오로지 투병을 일삼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고, 그래서 자연 붓과 멀어졌기 때문에 그 상(想)이 여간 무디지 않은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허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오래간만에 아름다운 자연의 품에 안겼으니 어디 붓끝을 다듬어보기로 하자.
어떤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를 걷어차고 일어나는 길로 컵 한 개만을 들고 천진동(天眞洞) 약수터로 발길을 옮겼다. 여기는 바로 산아래 숲속이라 그럴까, 어인 일인지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서 조금 적적하다.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나 4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궁핍한 가정환경에서 결코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 월사금을 낼 돈이 없어 돈을 훔치기라도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다녔던 보통학교 때의 생활은 그런 그녀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어린시절 궁핍했던 삶은 강경애가 가난한 대중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1920년대의 문단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수립을 목표로 그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1930년대의 문단은 작가들에게 대중을 선동하는 무기로서 △대공장 파업 △소작쟁의 △동맹 결성 등의 제제를 갖는 문학작품을 창작할 것을 요구했다. 강경애의 작품 역시 시대적 현상과 맞물려 당시의 투쟁경향이 드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