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어데인지 몰랐다. 어찌 생각하면 옛날 성(城)터 같기도 하고 어찌 생각하면 달빛이 어른대는 ─ 달빛이 어른댄다 하여도 또렷한 건 아니고 다만 어슴푸레한 흰빛이 떠돌아 “달이 비취는구나.”하는 느낌만 있을 뿐 ─ 허연 길 같기도 하였다. 넓이는 한 칸 통이 될는지 말는지, 길이는 무한한 가운데 유한한 듯하였다. 길은 길이라도 반공중(半空中)에 떠 있는 고대(高臺)인 듯하다. 그 길 위를 나하고 또 누구인지 둘하고, 셋이 묵묵히 거닐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그이는 아마 지나인(支那人)인 듯싶다.) 옛날 범중엄(范仲淹)의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를 새로이 짓겠다고 하였다. 그래 우리는 지금 악양루(岳陽樓) 옛터에 오른 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누(樓)의 자최라고는 주춧돌 하나도 없었다.
현진건(玄鎭健,1900- 1943)
대구 출생. 호는 빙허(憑虛). 1918년 일본 동경 성성중학(成城中學) 중퇴. 1918년 중국 상해의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부 입학했다가 그 이듬해 귀국.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관계함. 특히 <동아일보> 재직시에는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선수 손기정의 일장기 말살 사건에 연루되어 1 년간 복역함. 이 사건 이후 서울 자하문 밖에서 양계를 하다가 실패하고, 폭음으로 얻은 장결핵으로 사망했다. 처녀작은 1920년 <개벽> 12월호에 발표된 <희생화>이고 주요 대표작으로는 <빈처>(1921), <술 권하는 사회>(1921), <타락자>(1922) <할머니의 죽음>(1923), <운수좋은 날>(1924), (1924), <불>(1925),< 사립정신병원장>(1926) <고향>(1922) 등과 함께 장편 <무영탑>(1938), <적도>(1939) 등이 있다.
그는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우리 나라 근대 단편 소설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실주의 문학의 개척자이다. 전기의 작품 세계는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와 기본적 사회 단위인 가정 속에서 인간 관계를 다루면서 강한 현실 인식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했고, 그 때의 제재는 주로 모순과 사회 부조리에 밀착했었다. 그리고 1930년대 후기에 와서는 그 이전 단편에서 보였던 강한 현실 인식에서 탈피하여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