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작가들이 급속히 유물론의 세례를 받기 전에는 앞으로 상당한 시일을 두고 제파(諸派)의 문학은 오히려 진전의 과정을 밟을 것입니다. 또한 조선의 지식분자가 아직까지도 대부분 민족주의의 경향을 가지고 있는 터이라 그네들 지식층이 깡그리 몰락을 당할 날이 올 것을 가상하더라도 일조일석에 앞을 다투어 방향을 전환하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분간 주의에 관한 이론은 고사하고 같은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작품이라도 역사를 들추어 새삼스러이 위인걸사를 재현시키고 또는 창작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말고, 우리가 눈 앞에 당하고 있는 좀 더 생생한 사실과 인물을 그려서 대중의 가슴에 실감과 감격을 아울러 못 박아줄 만한 제재를 골라가지고 기교껏 표현할 것입니다. 엄연한 현실을 그대로 방불케 할 자유가 없는 고애(苦哀)야 동정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눈뜨고는 차마 볼 수 없는 모든 현상은 전연 돌보지 않고 몇 세기씩 기어올라가서 진부한 ‘테마’에 매달리는 구차한 수단을 상습적으로 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비겁한 현실도피인 까닭입니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네이버 지식백과] 심훈 [沈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