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해 여름 나는 친우 피예시(比約席)와의 약속에 응하야 그의 별장에서 여름을 나게 되었다.
내가 갔을 때 거기에는 이미 손이 몇 사람 와 있었다. 하나는 의사 러사로스(勒沙洛斯) 하나는 신문기자 후리멍(□拉孟) 그리고 또 하나는 중학교원이라는 피예·모퉁(比葉·莫東)이라는 사람이였는데 나는 초면이었다. 이상하게도 우리들 몇 사람이 모다 독신자였든 것이다. 피예시의 별장은 F라는데 있어 거기는 경치 좋고 조용한 시골이였다. 시내ㅅ물이 마음을 둘러쌋다. 내가에는 벗나무(樺) 숲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집이 여러 채 드문드문 있는데 어느 것은 중세기식(中世紀式)의 높은 집이고, 어느 것은 새 양식(洋式)이였다.
충북 괴산 출신으로 청주고보 졸업뒤 경성제대 중문과를 졸업(1940년)하고 휘문고 교사를 거쳐 서울대 중문과 조교수(1946~49)를 지냈다. 해방 직후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조선문학동맹’에서 활동했다. 학내 이념 대립 와중에 좌익으로 규정돼 교수직을 그만두었다가 인공치하에서 대학에 복귀해 몇달간 ‘반짝 총장’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