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그 집의 문을 빌렸을 뿐 천 칠백육십구 년 팔 월 십 오일―이 날은 세상의 뭇 백성이 영원히 기억해두어야 할 날. 이 마리아 승천절 날 태후 레티싸 나를 탄생하시매 침대 요 위에는 시저와 알렉산더의 초상이 있어 스스로 제왕의 선언을 해주다. 천팔백삼년 오월 십팔일 백성들은 드디어 내 제왕의 몸임을 발견하고 황제로 받들었다. 원로원은 공화제를 폐지하고 전 국민의 뜻 삼백오십칠만 이천삼백이십구표의 투표로써 황제로 추대하매 로마에서는 법왕이 대관식을 거행하러 몸소 파리로 왔고 십이월 이일 튜일러리 왕궁에서 노틀담으로 이르는 시오리 장간의 길을 보병이 늘어서고 일만의 기병이 팔두마차의 전후를 삼엄하게 경계하는 속으로 위풍이 당당하게 거동할 때 연도의 군중은 수백만 은은한 축하의 포성과 백성들의 기쁨의 부르짖음으로 파리의 시가는 한바탕 뒤집힐 듯 그 귀한 날을 얼마나 축복했던고. 내 조세핀과 함께 노틀담에 이르자 나선형의 스물한 층의 층계 그 위에는 진홍빛 용합을 둘러친 옥좌가 놓여 내 그날 있기를 기다리지 않았던가.
이효석은 경성 제국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鏡城) 농업학교 교사, 평양 대동강 공업전문학교와 숭실전문 교수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그는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 7월호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함으로써 동반작가로 문단에 데뷔하여, 유진오와 함께 동반작가로 활동하였으나 1933년 순수문학 주도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돈(豚)>(1933) 발표 후 순수문학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1936년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秀作)이라 할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필, 희곡 등 22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뇌막염으로 사망했는데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3대 단편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