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비안 쇼오는 노래와 춤을 밑천삼아 이곳으로 흘러든 가무단으로 반드시 셀비아 사람들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라 십여 명 단원이 백계 노인을 주로 하여 폴란드, 유태, 헝가리, 체코 등 각기 국적을 달리하고 가운데에는 유라시안도 끼어 있는─마치 조그만 인종의 전람회를 이룬 혼잡한 단체였다. 그들의 노래와 춤이 그다지 놀라운 것은 못되었으나 그들의 색다른 자태가 낯설은 곳에서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족했고 우리의 관주가 상당히 비싼 조건으로 그들과 선뜻 계약을 맺은 것도 그 점을 노려서였다.
한 시간 가량씩 하루 두 번씩 출연에 대한 사례가 오백 원, 엿새 동안에 삼천 원이라는 것이 그들을 맞이하는 거의 최고의 대접이었으며 생각컨대 만주 등지에서 일없이 뒹굴던 동호자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들을 모아 일거에 탐탁한 벌이나 해보려고 멀리 외지로 원정을 나온 그들로서도 역시 재주보다는 자기들의 그 이국적 풍모를 미끼삼아 보겠다는 심리가 없지도 않을 듯하다. 조선을 한 바퀴 돌고 나서는 또 어디로 가려는지 그것은 알 바 없으나 어떻든 그들의 풋날리는 이국정서는 거리에서는 진귀한 것이어서 그들을 계약한 관주의 수완과 야심을 우리들 사무원도 절대로 찬성하는 바였다. 실상인즉 그들의 걸음은 벌써 두 번째여서 지난 가을에 왔을 때에도 우리와 계약이 되어 의외의 호평으로 예상 이상으로 배를 불리운 일이 있어서 이번에 관주의 마음이 두 번째 혹한 것이나 그들로서도 전번보다는 더욱 충실을 기하기 위해 여덟 사람밖에 안되던 단원이 네 사람을 더해 열두 사람의 상당히 홍성한 일단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효석은 경성 제국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경성(鏡城) 농업학교 교사, 평양 대동강 공업전문학교와 숭실전문 교수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인텔리였다. 그는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 7월호에 단편소설 <도시와 유령>을 발표함으로써 동반작가로 문단에 데뷔하여, 유진오와 함께 동반작가로 활동하였으나 1933년 순수문학 주도의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돈(豚)>(1933) 발표 후 순수문학으로 전향하였다. 그는 1936년 한국 단편문학의 전형적인 수작(秀作)이라 할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장편 <화분>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필, 희곡 등 220여 편의 작품을 남기고 뇌막염으로 사망했는데 김동인, 현진건과 함께 3대 단편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