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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왕사 (한국문학전집 604)

말년에 이르러 西域[서역]으로서는 指空[지공]이니 그 제자인 懶翁(나옹)이니 하는 이와, 또 중국에 가서 권위 있는 道統[도통]을 받아왔다고 크게 명성을 얻은 太古普愚[태고보우]니 하는 이들이 대개는 술법으로써 그때 조정의 寵遇[총우]를 받은 이들이니까, 다른 때 같으면 그네들이 또한 이인이나 신승으로서 일세를 풍미하였을 것이지마는, 그네들이 다 한때는 기세가 있다가도 반딧불같이 금세 빛을 잃어버리게 됨은 역시 五[오]백 년 전에 죽은 道詵[도선]의 위력에 눌리기 때문이었읍니다.
말년에 이르러 西域[서역]으로서는 指空[지공]이니 그 제자인 懶翁(나옹)이니 하는 이와, 또 중국에 가서 권위 있는 道統[도통]을 받아왔다고 크게 명성을 얻은 太古普愚[태고보우]니 하는 이들이 대개는 술법으로써 그때 조정의 寵遇[총우]를 받은 이들이니까, 다른 때 같으면 그네들이 또한 이인이나 신승으로서 일세를 풍미하였을 것이지마는, 그네들이 다 한때는 기세가 있다가도 반딧불같이 금세 빛을 잃어버리게 됨은 역시 五[오]백 년 전에 죽은 道詵[도선]의 위력에 눌리기 때문이었읍니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7월부터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와세다대 정치학과 주관의 모의(模擬) 국회가 조선국왕이 일본에 알현하러 오는 가상의 상황을 토의 안건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6년 겨울 귀국 후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고 1908년 11월 잡지 『소년(少年)』을 출판하였다. 1910년 3월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 보기』, 1914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21년 10월 출옥하였고,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하였고,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동명』에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하였고, 1926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를 간행하였다. 같은 해 옛 백제 지역을 방문한 『심춘순례(尋春巡禮)』, 1927년 『백두산근참기(白頭山勤參記)』, 1928년 『금강예찬(金剛禮讚)』을 발표하였다.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1935년 2월 조선총독부 임시역사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神道) 보급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계회(朝鮮禊會)의 고문을 맡았고, 1936년 심전개발 정책의 일환으로출판된 강연집에 「조선의 고유신앙[朝鮮の固有信仰]」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부터 1938년 3월까지 3년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 문화의 당면과제[朝鮮文化の當面課題]」를 게재하였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건설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4월 만주로 건너가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이 되었다. 1939년 5월 만주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건국대학 연구원의 민족연구반과 역사연구반에 소속되었다.

1937년 11월 『재만조선인통신』 제39호의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의 「건국대학과 조선청년」, 1939년 7월호의 「전쟁과 교육」, 1941년 6월호의 「동방고민족의 신성(神聖) 관념」등 일본의 전쟁수행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 되었다. 『매일신보』를 통해 1943년 11월 5일자 「보람있게 죽자」, 11월 20일자 「나가자 청년학도야」, 11월 25일자 「오직 감력할 뿐」, 1944년 1월 1일자 「아시아의 해방」, 1945년 3월 7일자 「승리엔 젊은이의 힘」 등을 기고하였으며, 시국 선전용 대중잡지였던 『신시대』를 통해 1943년 3월 제3권 3호 「만주건국의 역사적 유래」, 1944년 2월 제4권 2호 「성전의 설문(說文)」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3년 11월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에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배 격려단’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달 일본의 조선인 가정 방문과 간담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1월 14일과 20일에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반도출신출정학도궐기대회에서 학병 지원 관련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잡지 『방송지우(放送之友)』에 1944년 3월 제2권 제3호 「도의(道義)는 이긴다」, 같은 해 4월 제2권 제4호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 1945년 1월 제3권 제1호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聖恩)에 보답합시다」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같은 해 5월 공판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였고,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최남선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4·9·11·13·20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90~73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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