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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와 백운 (한국문학전집 566)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 때에 된 일이다. 의좋은 두 사람이 한 동리에서 살았는데 한날 한시에 한 사람은 아들을 낳고 한 사람은 딸을 낳았다. 그런데 사내아이의 이름은 백운(白雲)이라 하고 계집아이의 이름은 제후(際厚)라 하였다. 두 집에서는 정혼(定婚)하여 두고 두 아이의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백운이 열네 살이 되매 인물이 출중하고 성품이 또한 청수하였다. 국선(國仙)이 된 지 일 년이 채 못되어 불행하게도 눈이 멀었다. 그렇게 되매 제후의 부모는 백운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 딸을 무진태수(茂榛太守)로 있는 이교평(李校平)이란 사람에게로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제후는 부모의 명령이라 어찌할 수 없어 무진으로 가면서 백운을 비밀히 찾아 손목을 잡고“내가 당신으로 더불어 한날 한시에 출생하였고, 장차 자라..
신라 진평왕(新羅 眞平王) 때에 된 일이다. 의좋은 두 사람이 한 동리에서 살았는데 한날 한시에 한 사람은 아들을 낳고 한 사람은 딸을 낳았다. 그런데 사내아이의 이름은 백운(白雲)이라 하고 계집아이의 이름은 제후(際厚)라 하였다. 두 집에서는 정혼(定婚)하여 두고 두 아이의 장성하기를 기다렸다.
백운이 열네 살이 되매 인물이 출중하고 성품이 또한 청수하였다. 국선(國仙)이 된 지 일 년이 채 못되어 불행하게도 눈이 멀었다. 그렇게 되매 제후의 부모는 백운과의 약속을 어기고 그 딸을 무진태수(茂榛太守)로 있는 이교평(李校平)이란 사람에게로 시집을 보내기로 하였다. 제후는 부모의 명령이라 어찌할 수 없어 무진으로 가면서 백운을 비밀히 찾아 손목을 잡고“내가 당신으로 더불어 한날 한시에 출생하였고, 장차 자라서는 부부되기로 언약한 지 오랬는데 이제 부모의 명령으로 할 수 없이 다른 곳으로 가기는 가나 그곳으로 간 뒤에는 나도 자유로운 몸이 되는 것이니 그대가 만약 나를 버리지 않으려면 내 뒤를 따라 무진으로 오시요”하고 떠났다.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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