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소설이라는 것을 보는 두 가지의 눈이 있다. 첫째는 신문인 측의 눈이요, 하나는 청교도적 문인의 눈이다.
이 두 가지의 눈을 따라서 신문소설에 관한 해석도 전연히 두 가지로 나누인다.
신문인에의 눈으로는 내용이 무엇보다도 제일 먼저 고려되는 것이 ‘이 소설이 신문 지상에 적합하냐, 매일 백 몇 십 행씩 연재를 하여 신문을 장식하면 독자가 그 때문에 끊으려는 신문을 끊지를 못하고 그냥 구독하겠느냐,
이 소설은 그만한 흥미와 매력을 가졌느냐, 첫 회부터 이 소설은 독자의 흥미를 넉넉히 끄을겠느냐, 중도에서 읽기 시작해도 넉넉히 흥미를 끄을겠느냐, 남의 집에 이웃을 가서 우연히 그 한 회를 보고도 그 소설의 매력에 취하여 이튿날부터 그 신문의 구독자가 되겠느냐, 매회에 넉넉히 클라이막스가 들어서 한 회뿐으로도 넉넉히 재미있게 보겠느냐, 지리한 점은 없느냐,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