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一年[일년] 전에 本誌[본지]에 「己丑三百年[기축삼백년]」이라 하여 己丑實錄[기축실록]에 新解釋[신해석]을 가미한 一文[일문]을 發表[발표]한 일이 있었다. 그러매 몇몇 讀者[독자]에게서 그와 유사 작품을 간간이 揭載[게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이에 지금 쓰는 것은 유명한 己卯士禍[기묘사화]에 관하여 余[여]의 見解[견해]를 가미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栗谷[율곡]이 經筵[경연]에서 선조대왕께,
『전하께서는 고래의 부도한 군주의 행한 일은 하나도 행하시지 않으셨읍니다. 색을 즐기지 않으셨고 술을 과히 하지 않으셨고, 遊()[유()]을 즐기지 않으셨고, 女樂[여락]이며 雜道[잡도]를 싫어하셨고, 신하들을 사랑하셨고 ― 황송하옵지만 고래의 어느 제왕에게도 부족이 없으실 만한 명군이옵니다. 다만 한 가지 士類[사류]를 좀더 높이 보아 주시옵소서.』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