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적당한 시기에 한국인에게 독립을 허여한다’는 카이로와 포츠담의 결의의 ‘적당한 시기’라는 것을 ‘우리 땅에서의 일본인의 전퇴’쯤으로 해석하고 ‘일본의 항복’과 ‘연합군의 조선 진주’를 진심으로 기뻐하고 환영하던 그 무렵이었소.
전쟁 통에 소위 ‘소개’라 하여 16년간 살던 집을 없이하고, 공중에 떠있던 나와 나의 가족들은, 이 기꺼운 시절에, 몸 의탁할 근거(주택)를 마련하느라고 쩔쩔매고 돌아갔었소. 가뜩이나 주택난에 허덕이는 경성 시내에서, 더욱이 독립한 내 나라를 찾아 돌아오는 많은 귀환인이며 전쟁에 밀려서 시골에 내려갔다가 도로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며, 독립한 내 나라 수도를 사모하여 몰려드는 무리며 등등으로, 서울의 주택난은 과연 극도에 달하여 있었소.
김동인(金東仁, 일본식 이름: 東 文仁 히가시 후미히토 / 金東文仁 가네히가시 후미히토, 1900년 10월 2일 ~ 1951년 1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대한민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언론인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금동(琴童), 금동인(琴童仁), 춘사(春士), 만덕(萬德), 시어딤이다.
1919년의 2.8 독립 선언과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이후 소설, 작품 활동에만 전념하였고,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친일 전향 의혹이 있다. 해방 후에는 이광수를 제명하려는 문단과 갈등을 빚다가 1946년 우파 문인들을 규합하여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였다. 생애 후반에는 불면증, 우울증, 중풍 등에 시달리다가 한국 전쟁 중 죽었다.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된다는 신념을 갖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나타난 자유 연애와 여성 해방 운동을 반대, 비판하기도 하였다. 현대적인 문체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필명은 김만덕, 시어딤, 김시어딤, 금동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