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히(三熙)가 친가엘 갈 때면 심지어 이웃사람들까지 더 할 수 없이 반가히 맞어 주었다.
물론 여기엔, 아직 어머니가 살어 게시는 욋딸이란 것도 있을지 모르고,또 그의 시집이 그리 초라하지 않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러한 대우가, 그의 모든 어렷을 적 기억과 더불어, 고향에 대한 다사로움을 언제까지나 그에게서 가시지 않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랬는데, 이번엔 어머니를 비롯해서, 어린 족하들까지,「아지머니 ─」하고는 그냥 말이 없을 정도다.
이럴 때마다, 삼히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 홀죽해짐 뺌에나 턱에 손을 가저가지 않으면, 빠지지하고 진땀이 솟는 이마를 쓰담고 애매한 우슴을 지어보거나, 또 공연히 무색해 하는 것이 버릇처럼 되었다.
이래서 그가 친가로 온 후 수일 동안은 그를 너무 알른 사람으로 극진히 해주는 고마운 마음들이, 되려 그를 중병자로 만든 세음이다.
1940년 12월 단편소설 「결별(訣別)」이 평론가 백철(白鐵)에 의해 『문장』에 추천됨으로써 등단하였다. 광복 직후 남편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역시 임화와 함께 월북하였다. 임화는 1953년 8월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된 바, 그 후 지하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지하련이 광복 전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체향초(滯鄕抄)」(『문장』, 1941.3)·「가을」(『조광』, 1941.11)·「산길」(『춘추』, 1942.3) 등이 있고, 광복 후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도정(道程)」(『문학』, 1946.8)·「광나루」(『조선춘추』, 1947.12)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예외 없이 섬세한 필치로 젊은 남녀의 심리를 추적한 것들이다.
삶의 조그마한 파편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보내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어찌 보면 다소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유장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짚어 나가는 지하련의 소설들은 이선희(李善熙)·최정희(崔貞熙) 등의 작품과 함께 이 시기 여성문학의 한 자리를 착실하게 담당한 존재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제 말 암흑기의 침묵 기간을 거친 후 광복 이듬해에 발표한 「도정」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면 해방 공간에서도 곳곳에서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의 핵심부에까지 파고 들어오는 현실과 그런 현실 앞에 맞서고 고민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작가의 날카로운 눈길에 의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 작품에 그려진 주인공의 고민은 결코 해방 공간이라는 한정된 시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규율과 개인적 양심 사이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전형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광복 직후 남한 좌익 조직 내에서 발생한 재건파 대 장안파의 해게모니 다툼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지하련이 남긴 창작집으로는 1948년 백양당(白楊堂)에서 간행된 『도정』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