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신고, 대문께로 나가는 발자취 소리까지 들렸으니, 뭘 더 의심할 여지도 없었으나, 순재는 일부러 미다지를 열고 남편이 잇나 없나를 한번 더 살핀 다음 그제사 자리로 와 앉었다.
앉어선 저도 모르게 호 ─ 한숨을 내쉬였다.
생각하면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는, 이 거치장스런 문제를 안고, 비록 하로ㅅ밤 동안이라고는 하지만 남편 앞에서 내색하지 않은 것이 되려 의심쩍을 일이기도 하나 한편 순재로선 또 제대로 여기 대한 다소간이나마 마음의 준비 없이 뛰어들 수는 없었든 것이다.
아직 단출한 살림이라 아츰 볕살이 영창에서 쨍 ─ 소리가 나도록 고요한 낮이다.
이제 뭐보다도 사태와 관련식혀 자기 처신에 대한 것을 먼저 정해야 할 일이었으나, 웬일인지 그는 모든 것이 한껏 부피고 어지럽기만 해서 막상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라는 것이 기껏 어제 문주와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1940년 12월 단편소설 「결별(訣別)」이 평론가 백철(白鐵)에 의해 『문장』에 추천됨으로써 등단하였다. 광복 직후 남편 임화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였고, 역시 임화와 함께 월북하였다. 임화는 1953년 8월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된 바, 그 후 지하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지하련이 광복 전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체향초(滯鄕抄)」(『문장』, 1941.3)·「가을」(『조광』, 1941.11)·「산길」(『춘추』, 1942.3) 등이 있고, 광복 후에 발표한 작품으로는 「도정(道程)」(『문학』, 1946.8)·「광나루」(『조선춘추』, 1947.12)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예외 없이 섬세한 필치로 젊은 남녀의 심리를 추적한 것들이다.
삶의 조그마한 파편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보내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어찌 보면 다소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유장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감정의 미세한 떨림을 짚어 나가는 지하련의 소설들은 이선희(李善熙)·최정희(崔貞熙) 등의 작품과 함께 이 시기 여성문학의 한 자리를 착실하게 담당한 존재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제 말 암흑기의 침묵 기간을 거친 후 광복 이듬해에 발표한 「도정」에서는 주목할 만한 변신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면 해방 공간에서도 곳곳에서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의 핵심부에까지 파고 들어오는 현실과 그런 현실 앞에 맞서고 고민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작가의 날카로운 눈길에 의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 작품에 그려진 주인공의 고민은 결코 해방 공간이라는 한정된 시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규율과 개인적 양심 사이의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전형의 면모를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작품은 광복 직후 남한 좌익 조직 내에서 발생한 재건파 대 장안파의 해게모니 다툼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될 만한 측면을 갖고 있기도 하다. 지하련이 남긴 창작집으로는 1948년 백양당(白楊堂)에서 간행된 『도정』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