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도 활인간인 이상 환경과 입장을 달리한다고 예술에서 추락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가 전연 이 시필을 안 든다면 별문제이거니와 부단히 시필을 잡고 있다면 사회주의에서 민족주의로 변절하였건 민족주의자가 사회주의자 되었든 간에 자기가 파악한 이데올로기에 의하여 시를 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니 그것은 결코 시의 추락이 아니라 시의 전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명민한 김씨는 이러한 이론의 접촉을 회피키 위하여 “시인으로서 사회인이 된다고 시를 못 쓸 리는 없다. 그러나 『쥐』의 요한에 한하여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운운하며 요한의 수편 단시를 인용하여 이것을 예증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씨의 말대로 저능아가 아닌 한은 시 『포도 맛』을 읊어 김씨에게 답을 하며 그의 독단을 웃었을 뿐만 아니라 『채석장』같은 우렁찬 리듬을 가진 시를 소위 사회인이 된 이후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926년 평론 「무산계급의 예술」과 시조작품 및 기타를 『시대일보』·『조선지광』·『동아일보』·『중외일보』 등에 발표하면서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에 가담하여 부르주와 예술과 형이상학을 비판했으나, 곧바로 전환하여 김화산(金華山) 등이 주도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문학의 편에 서서 카프파와 논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의 시작품은 시조와 단곡(短曲 : 짧은 악곡)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927년 영창서관에서 간행한 단독 사화집(詞華集)인 『흑방(黑房)의 선물』에는 「님 타신 망아지」 이하 50수의 시조작품과 「영원의 비애」 이하 46편의 단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시조라는 형식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일제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를 뜨겁게 나타내면서 응축된 표현의 묘미를 긴장되게 갖추고 있었다.”고 한 김용직(金容稷)의 말과 같이 권구현이 시도한 시조와 단곡 형식은 매우 의도적인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아나키즘 사상이 언제나 우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미내용과 기법을 일체화시키고 있다.
이외에도 「폐물(廢物)」(별건곤, 1927.2)과 「인육시장점묘(人肉市場點描)」(조선일보, 1933.9.28∼10.10.) 등 2편의 단편소설과 많은 평론과 수필을 지상에 발표하였다.
그는 서화에도 재능을 보이고 있는데,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번 입선하였고, 개인전도 몇 차례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미술평론에도 일가견을 이루어 「선사시대의 회화사」(『동광』, 1927.3∼5.)를 위시하여 몇 편의 미술평론과 단평을 발표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