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속아 산다는 세상이기로 ‘ 요같이 속이고 요같이 가증하게도 속아 산다는 말이냐?’
김철은 그래도 오늘 안으로 무엇을 찾을까하고 무슨 직업을 행여나 붙잡을까 하고 온종일 쏘다녔으나 역시 전일과 마찬가지로 빈주먹만 쥐고 자기 집대문 안을 들어서며 무엇을 한껏 원망하는 듯이 힘있게 부르짖었다.
오늘 아침에도 집밖을 나올 때에는 온갖 희망을 한아름 안고서 나오기는 나왔으나 이제 와서는 모두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보기 좋게 빠지고 말았다.
그래 말이 안나올 만치 기가 막힐 지경이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야 설마 무슨 빛이 안 보일라고… 조그만 벌이라도 생길터이지.’ 하고 서울바닥을 미친개 모양으로 허구헌날 쏘다녀 보았으나 오늘까지 밥벌이를 붙잡지 못하고 헛수고만 하였다. 가는 곳마다 모조리 거절을 당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