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칠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가지고 사람이 드문드문 다니는 서울의 밤거리를 혼자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어느 요리집에서 여러 친구들과 해가 있어서부터 먹고 마시기를 시작한 것이 자정이 넘어 새로 한시가 바라볼 때까지 진탕만탕 정신없이 먹고 놀다가 지금 첩의 집을 찾아가는 길이다.
‘빌어먹을 자식들 인력거는 무슨 인력거야? 이렇게 걸어가도 잘만 가 지는데’ 발이 허청에 놓이는 것같이 조금 비틀거리며 분명치 못한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 요리집 대문간을 나올 때에 여러 친구들이 인력거를 타자고 하는 것을 기생들만 태우게 하고 그들은 그대로 돌려보냈다.
인색하기 짝이 없고 돈만 아는 성칠의 본색을 이런데서 알아볼 수 있다. 어째서 그들과 어울려먹기는 먹었지만 요리집을 등지고 나올 때에는 어지간히 후회를 하였다. 그래 인력거를 타면 한 두 사람도 아니요 여럿이니까 돈이 어지간히 들것을 생각하고 자기부터 걸어가기로 작정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