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후미끼리 를 지나 < > 서소문 네거리로 나서니 휘모라치는 매서운 바람이 더한층 살을 애인다. 열한시에 떠나는 막차가 끊겨 마포에서부터 쉬엄쉬엄 걸어왔으니 생각할 나위도 없이 자정이되려면 머지 않았으리라. 더구나 금년에 여덟 살 나는 어린 놈을 이끌고 노리장화로 걸었으니 열두시가 혹시 넘었을는지도 모른다. 좀 비탈진 언덕을 걸어올라 가면서
“다리 아프지 않니?”
“아버지는?”
“나는 안 아프지만.”
“나도 안 아프다”
“참 장사로군 그래.”
말이 여덟 살이지 잔망한 품이 숙성한 여섯 살 됨직하다. 동짓달이 생일이라는 한가지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도 돌 안 되어 어미의 따뜻한 품안을 떠나고 어린 것의 생명수인 젖을 어미가 가지고 가버렸다는 것이 그를 내내 연약하게 만든 더 큰 원인이 안 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소설가 겸 평론가, 영화제작자이다. 호는 효봉(曉峰)이며, 효봉산인(曉峰山人)이라는 필명도 사용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10대 때부터 소설 습작을 시작하여, 1921년에 《조선일보》에 〈성탄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1922년에는 염군사에 가담하고 1924년에 서울청년회 소속으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립을 주도했다. 카프 중앙위원과 서기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