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찾으려고 산 설고 물 설은 대판까지 간 불쌍한 소녀 순희가 의 외로 아버님이 석탄광이 무너져서 치어 죽었다는 눈물겨운 편지를 개성 있 는 창렬이에게 하였으나 창렬이는 그때 그 편지를 받지 못하고 개성에 있지 않았으니 과연 창렬이는 어디를 갔겠습니까? 씩씩한 기운으로 전조선육상경기대회를 마치고 난 창렬이는 완고한 부모 님이 허락은 안 하시나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5 월 20일! 바로 순희가 편지한 지 사흘 전에 개성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에게 알리지도 않고 허락도 없이 아버님이 일가 집에 갖다주라는 돈 60원을 가지고 떠난 것이었습니다. 아버님 몰래 더욱 심부름할 돈을 넌지시 가지고 도망 나온 것은 잘못인 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마는 장래에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지금 잠깐동안 부 모를 속여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개성 정거장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탄 것이었습니다. 창렬이는 아무리 굳은 결심은 있으나 그래도 정들었던 개성과 어머님 슬 하를 떠나는 것이 섭섭하려니와 앞으로 어떻게 하여 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매 아득한 마음을 금치 못하여 모르는 사이에 기차 속에서 주먹으로 눈물 을 씻고 씻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마는 오직 창렬의 앞길에는 장래를 굳게 약속한 서울의 일균이와 대구 상봉이와 평양 영호며 또 대판에 있는 순희를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든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창렬이는 차장에게 전보 용지를 청해서 우선 서 울 일균이에게 몇 시에 경성역에 도착한다는 전보 한 장을 띄웠습니다. 용감한 소년 창렬이를 실은 기차는 그날 오후 네 시 반에 경성 정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삼 년 전에 보통학교 오학년 때에 수학여행으로 서울을 왔 다 가고는 지금이 처음이라 새로 지은 정거장의 찬란한 모양을 두리번- 돌 아보면서 창렬이가 나올 때 플랫폼에서 창렬의 손을 벗석쥐고 “아- 창렬 씨!” 하고 반갑게 인사하는 소년은 물론 일균이었습니다.
색동회를 중심으로 동화를 창작하거나 구연해 어린이의 정서함양에 이바지했다. 필명은 다다이슴을 표방하여 고따따라고 했다. 도쿄 유학시절인 1920년 봄에 김우진·홍해성 등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조직하고, 연극의 새로운 방향에 대해 매주 토론회를 열었다.
개성출신의 도쿄 유학생 단체인 송경학우회를 이끌고 귀국해 1921년 7월 27~28일 개성좌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1923년에는 형설회순회연극단을 조직해 직접 각색한 〈장구한 밤〉·〈4인 남매〉 등을 공연하기도 했다.
그뒤 연극보다는 아동문학에 관심을 갖고 1923년 방정환 등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한 뒤, 〈어린이〉에 동화 〈까마귀와 공작새〉(1926. 2)·〈무사와 공주〉(1928. 7) 등을 발표했다. 해방직후 개벽사에 근무하면서 〈어린이〉를 속간했다. 동화집으로 〈무지개〉(1927)를 펴냈고, 평론으로 〈따따이즘〉(개벽, 1924. 9)·〈DA·DA〉(동아일보, 1924. 11. 17) 등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