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0 0 10 60 0 8년전 0

들메 (한국문학전집 433)

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집 벽장 속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
갓 둘레가 깔쪽깔쪽한 오십전짜리 은전 한 푼이 나의 총재산이었다. 이 오십전으로 서울까지의 삼백리 길 노자를 해야 했고, 이 오십전으로 백사지 땅이나 진배없는 서울에서 고학을 해야 했다. 아무리 물가가 싼 시절이라 하지마는 정말 터무니없는 공상이었다. 열세 살 때 일이다.

그때만 해도 집에서는 얼마간의 학비쯤은 보태어줄 수도 있는 형편이기도 했었다. 두 섬지기의 광작이었고 남한테 내어준 땅섬지기로 텃도지 들어오는 것도 약간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 보조도 바랄 수 없이 일을 저지르고 집을 떠났었다. 서울공부 가는 것을 방해하는 형을 재떨이로 때리어 머리를 터뜨렸던 것이다. 아버지한테 붙들리기만, 하면 반은 죽는 판이다. 그날 밤을 메밀묵 장사 하는 복순네 집 벽장 속에서 새우고, 이튿날 새벽 먼동이 트기도 전에 길을 떠났던 것이다. 맨주먹으로라도 떠날 작정이었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오십전 한 푼을 주시면서,

"음성 가서 며칠 있다가 오너라. 끼니 거르지 말구 떡을 사먹는지 밥을 사먹든지 해."

이렇게 일러주신다. 아버지 성미를 아시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도 더 겁이 나시는 눈치시었다. 처음 만져보는 닷 냥짜리다. 그때는 어린 생각에는 이 닷 냥만 가지면 조선땅이라도 살 수 있을 것처럼 내게는 큰돈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 해 설날 양직 분홍 두루마기를 새로 해 입었었다. 양직이 우리 시골에 처음으로 들어왔었다. 값이 비싸서 아무도 엄두도 못 내는데 어머니가 막내아들이라고 끊어주셨던 것이다. 그것을 입고 이화(모표)없는 마래기(모자)를 쓰고 나선 것이다.

집에서 이천까지는 백사십리나 된다. 장원까지는 지름길을 왔으니까 백이십리 폭이지만 열세 살 난 소년한테는 벅찬 길이었다. 그래도 그날로 이천까지 왔었다. 두 끼 먹고 하루 숙박에 한 냥(십전)이었다. 음성 외가댁에 가서 며칠 묵은 일은 있었지만, 집을 떠나서 객지에 나오기는 이것이 처음이다. 저녁을 먹고 앉았으려니까 설움이 복받친다. 나는 어린애처럼 엉엉 울고 말았었다. 울다가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니 먼동이 튼다. 나는 아침도 안 먹고 또 길을 떠났었다. 보행 객줏집 할머니가 신통하다고 하시면서 닷돈(5전)을 되거슬러 주신다. 서울까지는 아직도 백오십리였다. 경안까지 겨우 와서 자고 이튿날 서울에 들어왔다. 지금 생각하니 왕십리다. 서울에는 같이 졸업한 화석이가 먼저 와서 있었다. 화석이는 용산에 고모님이 계시기도 했지만, 집안도 넉넉했다. 내가 터무니없는 고학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실은 이 화석이 때문이었다. 화석이한테 지기가 싫었다. 화석이가 일번 내가 이번으로 졸업은 했지만 사뭇 일번을 번갈아 다투던 화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석이는 반가워했다. 보름턱이나 먼저 올라온 화석이는 전차도 탈줄 알았고, 학교도 혼자서 찾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얘, 저 육중한 것이 어떻게 저렇게 좁다란 쇠길 위로 달리면서도 쓰러지지를 않는다지?"
충청북도 음성 출신. 본명은 용구(龍九).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오중학교[成城中學校]에 다녔다. 이 때 일본 작가 가토[加藤武雄]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4년간 작가 수업을 받았다.

19세 때인 1926년에 장편 「의지(依支) 없는 영혼(靈魂)」을, 그 다음해에 장편 「폐허」를 간행함으로써 소설가로서 조숙한 출발을 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소학교 교원,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 등을 전전하면서 많은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고, 구인회(九人會) 동인, 『조선문학』 주간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반역자」(1931)·「지축을 돌리는 사람들」(1932)·「루바슈카」(1933)·「농부」(1934) 등이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저항의식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이무영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다소간 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무영은 오래 전부터 흙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무영이 이것을 실천에 옮긴 것은 1939년으로, 신문사 기자를 그만두고 경기도 군포 근처인 궁촌이라는 곳으로 솔가한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농경과 문필을 병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소설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제1과 제1장」(1939)·「흙의 노예」(1940)는 이때 얻은 수작으로 이무영의 대표작인 동시에 우리나라 농민소설의 명작에 해당한다. 이무영은 여기서 농경의 신성함과 농민의 성실한 삶을 예찬하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농촌의 가난의 참상을 묘사하고 있고, 농촌피폐의 원인을 캐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조는 온건한 편인데, 이는 당시 당국의 검열을 의식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무영의 이러한 생활은 6·25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농민」(1950)·「농군」(1953)·「노농」(1954) 등 장편농민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 장편에서는 농민들의 역사적 수난과 항거를 서사적으로 그렸으나 그 뒤 이무영은 다시 시정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숙향의 경우」(1955), 「계절의 풍속도」(1958) 등에서 주로 애정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이무영은 보수적인 모럴을 고수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해군 정훈감,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단국대학교 교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농민문학의 선구자이자 제일인자로 천재적이기보다는 노력형의 작가였으며, 항상 진실을 중시하고 건실한 문학을 위하여 일관된 노력을 기울였던 성실하고 중후한 작가였다. 특히, 농민소설에 바친 정열과 그 성과는 당연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페이퍼 대표 이병훈 | 316-86-00520 | 통신판매 2017-서울강남-00994 서울 강남구 학동로2길19, 2층 (논현동,세일빌딩) 02-577-6002 help@upaper.net 개인정보책임 : 이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