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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한국문학전집 431)

"그래, 어떻게 됐수? 오늘은 뭬랍디까?" 대문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불도 못 땐 냉방에서 화롯전을 끼고 새우잠을 자던 인숙이가 뛰어나와서 이렇게 물을 것을 생각하자 그의 발은 가끔 가다가 우뚝우뚝 멈춰졌다. 날씨는 춥다 못해서 매웠다. 한시를 지난 종로통에는 인적조차 끊겼다. 가끔 쟁반만한 두 눈을 부라리며 기생을 실은 자동차가 기가 나서 거리를 질주할 뿐이다. 상점 문도 다 닫힌 밤의 서울에서 파란불을 켠 카페만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충노만은 동대문 통에서 종로 앞까지 오도록 한 곳도 부르는 집이 없었다. 하얀 에이프런 속에 손을 감춘 여급들이 빼꼼 빼꼼 내어다보고는 깰깰거리기만 한다. 그의 주머니 속은 동전 서 푼만이 짤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
"그래, 어떻게 됐수? 오늘은 뭬랍디까?"

대문턱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불도 못 땐 냉방에서 화롯전을 끼고 새우잠을 자던 인숙이가 뛰어나와서 이렇게 물을 것을 생각하자 그의 발은 가끔 가다가 우뚝우뚝 멈춰졌다. 날씨는 춥다 못해서 매웠다. 한시를 지난 종로통에는 인적조차 끊겼다. 가끔 쟁반만한 두 눈을 부라리며 기생을 실은 자동차가 기가 나서 거리를 질주할 뿐이다. 상점 문도 다 닫힌 밤의 서울에서 파란불을 켠 카페만이 아가리를 딱 벌리고 지나가는 사람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충노만은 동대문 통에서 종로 앞까지 오도록 한 곳도 부르는 집이 없었다. 하얀 에이프런 속에 손을 감춘 여급들이 빼꼼 빼꼼 내어다보고는 깰깰거리기만 한다. 그의 주머니 속은 동전 서 푼만이 짤랑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종일토록 굶었다. 아침에 ××회관에 갔다가 친구한테 지당가우 한 개를 얻어먹고 쫄쫄 굶었다. 그래도 저녁때까지는 속이 쓰린 것이 깔딱 죽을 것같이 시장하더니 인제는 배가 고픈지 만지조차 요량할 수 없었다.

"내가 주책없는 짓이지! 내게 결혼이 당한 겐가."

충노는 종묘 앞을 지나서며 곰곰 생각하였다. 아침에 나와서 이때까지 ××회에서 딴 짓 한 줄 모르고 오늘쯤은 결정이 난다는 바람에 큰 수나 나는 듯이 눈이 짓무르게 기다리고 있을 아내를 생각할 때 안타까운 생각이 더럭 났다. 그것은 두 달째 끌어오던 취직 문제였다. 그 자신 고의로 속이잔 것은 아니었지마는 직업을 주선해주는 P씨가 내일, 모레, 글피 하고 엿가래 늘리듯 미뤄오는 바람에 그는 거의 날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굶기에 넌더리를 낸 아내는 이것저것 모르고 그가 번뜻만 하면 꼬치꼬치 캔다.

"어떻게 됐수? 오늘은 또 뭬랍디까?"

그래도 처음 몇 번은 사실대로 전달하였지마는 그것도 한두 번이다. 차마 낯이 간지러워서 말에 궁하면 성을 팩 내어서 아내의 말문을 콱 막아버린 적도 있었다.

"이건 우물에 가서 숭늉 달라잖겠나. 취직이 그렇게도 쉬운가?"
충청북도 음성 출신. 본명은 용구(龍九). 192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도중에 중퇴하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조오중학교[成城中學校]에 다녔다. 이 때 일본 작가 가토[加藤武雄]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4년간 작가 수업을 받았다.

19세 때인 1926년에 장편 「의지(依支) 없는 영혼(靈魂)」을, 그 다음해에 장편 「폐허」를 간행함으로써 소설가로서 조숙한 출발을 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소학교 교원,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 등을 전전하면서 많은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고, 구인회(九人會) 동인, 『조선문학』 주간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반역자」(1931)·「지축을 돌리는 사람들」(1932)·「루바슈카」(1933)·「농부」(1934) 등이 초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는 무정부주의적인 저항의식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이무영이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다소간 그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무영은 오래 전부터 흙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무영이 이것을 실천에 옮긴 것은 1939년으로, 신문사 기자를 그만두고 경기도 군포 근처인 궁촌이라는 곳으로 솔가한 때부터이다. 이때부터 농경과 문필을 병행하면서 본격적으로 농민소설 창작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제1과 제1장」(1939)·「흙의 노예」(1940)는 이때 얻은 수작으로 이무영의 대표작인 동시에 우리나라 농민소설의 명작에 해당한다. 이무영은 여기서 농경의 신성함과 농민의 성실한 삶을 예찬하고 있으며, 아울러 당시 농촌의 가난의 참상을 묘사하고 있고, 농촌피폐의 원인을 캐보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조는 온건한 편인데, 이는 당시 당국의 검열을 의식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이무영의 이러한 생활은 6·25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광복 후에는 「농민」(1950)·「농군」(1953)·「노농」(1954) 등 장편농민소설을 발표하였다. 이들 장편에서는 농민들의 역사적 수난과 항거를 서사적으로 그렸으나 그 뒤 이무영은 다시 시정문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숙향의 경우」(1955), 「계절의 풍속도」(1958) 등에서 주로 애정 문제를 다루었는데, 여기서 이무영은 보수적인 모럴을 고수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해군 정훈감,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단국대학교 교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농민문학의 선구자이자 제일인자로 천재적이기보다는 노력형의 작가였으며, 항상 진실을 중시하고 건실한 문학을 위하여 일관된 노력을 기울였던 성실하고 중후한 작가였다. 특히, 농민소설에 바친 정열과 그 성과는 당연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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