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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강냉 (한국문학전집 428)

다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부벽루(浮碧樓)라, 빛 낡은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을 뿐, 새 한 마리 앉아 있지 않았다. 고요한 그 속을 들어서기가 그림이나 찢는 것 같아 현(玄)은 축대 아래로만 어정거리며 다락을 우러러본다. 질퍽하게 굵은 기둥들, 힘 내닫는 대로 밀어던진 첨차와 촛가지의 깎음새들, 이조(李朝)의 문물(文物)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다락에 비겨 대동강은 너무나 차다. 물이 아니라 유리 같은 것이 부벽루에서도 한 뼘처럼 들여다보인다. 푸르기는 하면서도 마름〔水草〕의 포기포기 흐늘거리는 것, 조약돌 사이사이가 미꾸리라도 한 마리 엎디었기만 하면 숨 쉬는 것까지 보일 듯싶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수도국 다리를 빠져, 청류벽(淸流壁)을 돌아서는 ..
다락에는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부벽루(浮碧樓)라, 빛 낡은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을 뿐, 새 한 마리 앉아 있지 않았다. 고요한 그 속을 들어서기가 그림이나 찢는 것 같아 현(玄)은 축대 아래로만 어정거리며 다락을 우러러본다.

질퍽하게 굵은 기둥들, 힘 내닫는 대로 밀어던진 첨차와 촛가지의 깎음새들, 이조(李朝)의 문물(文物)다운 우직한 순정이 군데군데서 구수하게 풍겨 나온다.

다락에 비겨 대동강은 너무나 차다. 물이 아니라 유리 같은 것이 부벽루에서도 한 뼘처럼 들여다보인다. 푸르기는 하면서도 마름〔水草〕의 포기포기 흐늘거리는 것, 조약돌 사이사이가 미꾸리라도 한 마리 엎디었기만 하면 숨 쉬는 것까지 보일 듯싶다. 물은 흐르나 소리도 없다. 수도국 다리를 빠져, 청류벽(淸流壁)을 돌아서는 비단필이 훨적 펼쳐진 듯 질펀하게 깔려 나갔는데 하늘과 물은 함께 저녁놀에 물들어 아득한 장미꽃밭으로 사라져 버렸다. 연광정(練光亭) 앞으로부터 까뭇까뭇 널려 있는 마상이와 수상선들, 하나도 움직여 보이지 않는다. 끝없는 대동벌에 점점이 놓인 구릉(丘陵)들과 함께 자못 유구한 맛이 난다.

현은 피우던 담배를 내어던지고 저고리 단추를 여미었다. 단풍은 이제부터 익기 시작하나 날씨는 어느덧 손이 시리다.

'조선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

현은 부여(夫餘)에 가서 낙화암(落花巖)이며 백마강(白馬江)의 호젓함을 바라보던 생각이 난다.

현은 평양이 십여 년 만이다. 소설에서 평양 장면을 쓰게 될 때마다, 이번에는 좀 새로 가보고 써야, 스케치를 해와야, 하고 벼르기만 했지, 한 번도 그래서 와보지는 못하였다. 소설을 위해서뿐 아니라 친구들도 가끔 놀러 오라는 편지가 있었다. 학창 때 사귄 벗들로, 이곳 부회 의원이요 실업가인 김(金)도 있고, 어느 고등보통학교에서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치는 박(朴)도 있건만, 그들의 편지에 한 번도 용기를 내어 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 받은 박의 편지는 놀러 오라는 말이 있던 편지보다 오히려 현의 마음을 끌었다.

―---내 시간이 반이 없어진 것은 자네도 짐작할 걸세. 편안하긴 허이. 그러나 전임으론 나가 주고 시간으로나 다녀 주기를 바라는 눈칠세. 나머지 시간이라야 그리 오래 지탱돼 나갈 학과 같지는 않네. 그것마저 없어지는 날 나도 그때 아주 손을 씻어 버리려 아직은 지싯지싯 붙어 있네.

하는 사연을 읽고는 갑자기 박을 가 만나 주고 싶었다. 만나야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고 싶어 전보만 한 장 치고 훌쩍 떠나 내려온 것이다.

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어 터부룩한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비웃는 웃음은 전에 못 보던 표정이었다. 그 다니는 학교에서만 지싯지싯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 않게 여기는,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 같았다. 현은 박의 그런 지싯지싯함에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또 자기의 작품들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졌다.

한참이나 붙들고 섰던 손목을 놓고, 그들은 우선 대합실로 들어왔다. 할 말은 많은 듯하면서도 지껄여 보고 싶은 말은 골라 낼 수가 없었다. 이내 다시 일어나 현은,

"나 좀 혼자 걸어 보구 싶네."
호는 상허(常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서 공부했다. 귀국한 뒤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1930년말에는 〈문장〉의 소설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태응·곽하신·임옥인 등을 배출했다. 8·15해방 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임화·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7년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기행에 나섰고, 6·25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3년 남조선노동당 인물들과 함께 숙청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외되었고, 1955년 소련파가 숙청될 때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함경남도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1925년에 시골여인의 무절제한 성생활을 그린 〈오몽녀 五夢女〉(시대일보, 1925. 8. 13)로 등단한 뒤, 〈불우선생 不遇先生〉(삼천리, 1932. 4)·〈달밤〉(중앙, 1933. 11)·〈손거부 孫巨富〉(신동아, 1935. 11)·〈가마귀〉(조광, 1936. 1)· 〈복덕방〉(조광, 1937. 3) 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현실과는 무관한 인물들을 그리고 있지만 대부분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는 특히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의 정련(精練)을 강조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쳤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사에서 소설의 기법적 완숙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1948년 북한의 토지개혁 문제를 다룬 〈농토〉를 펴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군에 대한 적대감을 그린 〈첫 전투〉와 〈고향길〉을 펴냈다. 이 시기에는 초기와는 달리 정치·사회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선전·선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이념적 변화를 형상화한 〈해방전후〉나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을 그려낸 〈농토〉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소설집으로 〈달밤〉(1934)·〈구원의 여상〉(1937)·〈화관〉(1938)·〈이태준 단편집〉(1941)·〈돌다리〉(1943) 등과, 수필집으로 〈무서록 無序錄〉 등이 있다. 그밖에 한 시대의 뛰어난 저서로 평가받은 〈문장론〉· 〈문장강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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