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두 빈자떡을 부치는 게로군, 흥……."
한 오륙 년째 안초시는 말끝마다 '젠―장……'이 아니면 '흥!' 하는 코웃음을 잘 붙이었다.
"추석이 벌써 낼 모레지! 젠―장……."
안초시는 저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었다. 기름내가 코에 풍기는 듯 대뜸 입 안에 침이 흥건해지고 전에 괜찮게 지낼 때, 충치니 풍치니 하던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래윗니가 송곳 끝같이 날카로워짐을 느끼었다.
안초시는 그 날카로워진 이를 빈 입인 채 빠드득 소리가 나게 한번 물어 보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천리같이 트였는데 조각구름들이 여기저기 널리었다. 어떤 구름은 깨끗이 바래 말린 옥양목처럼 흰빛이 눈이 부시다. 안초시는 이내 자기의 때 묻은 적삼 생각이 났다. 소매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날래 들리지 않는다. 거기는 한 조박의 녹두빈자나 한잔의 약주로써 어쩌지 못할, 더 슬픔과 더 고적함이 품겨 있는 것 같았다.
혹혹 소매 끝을 불어보고 손끝으로 튀겨 보기도 하다가 목침을 세우고 눕고 말았다.
"이사는 팔하고 사오는 이십이라 천이 되지…… 가만…… 천이라? 사로 했으니 사천이라 사천 평…… 매 평에 아주 줄여 잡아 오 환씩만 하게 돼두 사 환 칠십오 전씩이 남으니, 그럼…… 사사는 십륙 일만 육천 환하구……."
안초시가 다시 주먹구구를 거듭해서 얻어 낸 총액이 일만 구천 원, 단 천 원만 들여도 일만 구천 원이 되리라는 셈속이니, 만 원만 들이면 그게 얼만가?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마가 화끈했다. 도사렸던 무릎을 얼른 곧추세우고 뒤나 보려는 사람처럼 쪼그렸다. 마코 갑이 번연히 빈 것인 줄 알면서도 다시 집어다 눌러 보았다. 주머니에는 단돈 십 전, 그도 안경다리를 고친다고 벌써 세 번짼가 네 번째 딸에게서 사오십 전씩 얻어 가지고는 번번이 담뱃값으로 다 내어보내고 말던 최후의 십 전, 안초시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것을 집어내었다. 백통화 한 푼을 얹은 야윈 손바닥, 가만히 떨리었다. 서참의(徐參議)의 투박한 손을 생각하면 너무나 얇고 잔망스러운 손이거니 하였다. 그러나, 이따금 술잔은 얻어먹고, 이렇게 내 방처럼 그의 복덕방(福德房)에서 잠까지 빌려 자건만 한 번도, 집 거간이나 해먹는 서참의의 생활이 부럽지는 않았다. 그래도 언제든지 한번쯤은 무슨 수가 생기어 다시 한 번 내 집을 쓰게 되고, 내 밥을 먹게 되고, 내 힘과 내 낯으로 다시 한 번 세상에 부딪혀 보려니 믿어졌다.
초시는 전에 어떤 관상쟁이의 '엄지손가락을 안으로 넣고 주먹을 쥐어야 재물이 나가지 않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늘 그렇게 쥐노라고는 했지만 문득 생각이 나 내려다볼 때는, 으레 엄지손가락이 얄밉도록 밖으로만 쥐어져 있었다. 그래 드팀전을 하다가도 실패를 하였고, 그래 집까지 잡혀서 장전을 내었다가도 그만 화재를 보았거니 하는 것이다.
"이놈의 엄지손가락아, 안으로 좀 들어가아, 젠―장."
하고 연습삼아 엄지손가락을 먼저 안으로 넣고 아프도록 두 주먹을 꽉 쥐어 보았다. 그리고 당장 내어보낼 돈이면서도 그 십 전짜리를 그렇게 쥔 주먹에 단단히 넣고 담배 가게로 나갔다.
이 복덕방에는 흔히 세 늙은이가 모이었다.
호는 상허(常虛)·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서 공부했다. 귀국한 뒤로는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 기자로도 활동했다. 1933년 구인회 회원으로 가입했고, 1930년말에는 〈문장〉의 소설 추천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최태응·곽하신·임옥인 등을 배출했다. 8·15해방 후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임화·김남천 등과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월북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1947년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기행에 나섰고, 6·25전쟁 때는 북한의 종군작가로 참가했다. 1953년 남조선노동당 인물들과 함께 숙청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외되었고, 1955년 소련파가 숙청될 때 가혹한 비판을 받고 숙청되었다. 함경남도 노동신문사 교정원으로 일했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1953년 숙청이 끝난 가을 자강도 산간 협동농장에서 막노동을 하다 1960년대 초에 병사했다는 증언도 있다.
1925년에 시골여인의 무절제한 성생활을 그린 〈오몽녀 五夢女〉(시대일보, 1925. 8. 13)로 등단한 뒤, 〈불우선생 不遇先生〉(삼천리, 1932. 4)·〈달밤〉(중앙, 1933. 11)·〈손거부 孫巨富〉(신동아, 1935. 11)·〈가마귀〉(조광, 1936. 1)· 〈복덕방〉(조광, 1937. 3) 등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현실과는 무관한 인물들을 그리고 있지만 대부분 토착적인 생활의 단면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는 특히 문학의 자율성과 언어의 정련(精練)을 강조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몇 번을 되풀이해 고쳤는데, 이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한국문학사에서 소설의 기법적 완숙과 예술적 가치를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1948년 북한의 토지개혁 문제를 다룬 〈농토〉를 펴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군에 대한 적대감을 그린 〈첫 전투〉와 〈고향길〉을 펴냈다. 이 시기에는 초기와는 달리 정치·사회현실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선전·선동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상황에서 자신의 이념적 변화를 형상화한 〈해방전후〉나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을 그려낸 〈농토〉 등이 그러한 작품이다. 소설집으로 〈달밤〉(1934)·〈구원의 여상〉(1937)·〈화관〉(1938)·〈이태준 단편집〉(1941)·〈돌다리〉(1943) 등과, 수필집으로 〈무서록 無序錄〉 등이 있다. 그밖에 한 시대의 뛰어난 저서로 평가받은 〈문장론〉· 〈문장강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