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배(榮培)의 아내가 해산을 마치고, 산파도 아이를 목욕시켜놓은 뒤에 다른 데로 또 해산을 보러 갔다. 집안은 난리를 치른 뒤처럼 허청했다. 영배는 마루에서 부채를 부치고 앉았다. 그 아내는 방에 모기장을 치고 갓난아이를 곁에 누이고 드러누웠다. 해는 떨어지려면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았다. 그러나 모기장을 벌써 친 것은 파리가 너무나 꼬인 까닭에,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영배는 그 안날 아침부터 오늘 낮까지 하루 동안 지낸 일이 꿈결 같았다. 그의 아내가 아이를 밴 뒤로부터 칠팔 개월 동안을 두고, 그는 매일처럼 여자의 해산에 대하여 호기심과 공포심을 아니 품은 적은 없었다. 여러 가지로 상상할 수 있는 데까지 상상해보았다. 자기가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 역시 어머니의 태반을 떠나올 때의 여러 가지를 상상할 때에는 언제든지 어떠한 신비를 느끼었다. 그래서 자기의 처가 해산할 때에는 기어이 한 번 실지로 보고 싶다고 생각하였었다. 그리하여 자기의 상상과 얼마나 틀리는지, 또는 맞는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호기심은 아내의 배가 달이 차서 불러가는 그 비례로 자라왔었다. 물론 이러한 호기심을 가지고 해산하는 것을 상상할 때에 여러 가지 나쁜 결과까지 아니 생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난산으로 그대로 영영 죽어버린 여러 사람의 일까지라도 아니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반드시 그런 위험을 느끼었었다. 그러면서도 해산이란 어떠한 것인지 보고 싶었었다.
호는 성해(星海). 전라북도 전주 출생. 1925년을 전후하여 4∼5년의 짧은 기간 동안 작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한때 『동아일보』의 학예부장을 거쳐 『매일신보(每日申報)』 편집국장을 지냈다.
1923년『백조』의 동인이었던 김기진(金基鎭)·박영희(朴英熙) 등과 현실극복을 위한 ‘힘의 문학’을 주장하면서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단체를 만들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과 저항 의식을 내세우는 신경향파 문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25년에 파스큘라 동인들과 함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발기인이 되어 계급문학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잡지 『생장(生長)』·『조선문단』·『개벽』 등에 발표되었는데, 「어촌」·「젊은 교사」·「흙의 세례」·「길 잃은 범선(帆船)」·「짓밟힌 진주」·「쫓기어가는 사람들」·「광란」 등의 단편소설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1926년에 단편집 『흙의 세례』(문예운동사)를 간행하였으며, 1927년 계급문학 운동의 방향 전환 이후에는 조직운동에서 이탈하였다.
그의 작품은 당시의 경향적인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빈한한 농촌생활이나 도시 노동자들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을 그려낸 것이 많다. 「쫓기어 가는 사람들」이나 「광란」 같은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한 작가의식은 극적인 상황의식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는 기법과 함께 당시 문단에서 주목되었던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