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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원 75전 (한국문학전집 416)

장안에 궂은비 내리고 삼각산에 첫눈이 쌓이던 날이었다. 나는 왼종일 엎드려서 신문, 잡지, 원고지와 씨름을 하였다. 마음은 묵직하고 머리가 띵한 것이 무엇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고 붓을 잡아도 역시 무엇이 써질 듯하면서 써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화가 더럭더럭 나서 보던 잡지로 낯을 가리고 누워 버렸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이 올 리가 없다. 끝도 없고 머리도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는 터져 버리고 떠올라서는 터져 버렸다. 생각의 실마리가 흐트러지고 그것이 현실과 항상 뒤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면 가슴이 갑갑하고 누웠던 자리까지 배기는 듯이 편안치 않았다. 그만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으나 또한 별수 없었다. 바깥날이 흐리니 방안은 어두컴컴하여 침울한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비는 개었는지 밖은 고..
장안에 궂은비 내리고 삼각산에 첫눈이 쌓이던 날이었다.

나는 왼종일 엎드려서 신문, 잡지, 원고지와 씨름을 하였다. 마음은 묵직하고 머리가 띵한 것이 무엇을 읽어도 눈에 들지 않고 붓을 잡아도 역시 무엇이 써질 듯하면서 써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화가 더럭더럭 나서 보던 잡지로 낯을 가리고 누워 버렸다. 눈을 감았으나 졸음이 올 리가 없다. 끝도 없고 머리도 없는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라서는 터져 버리고 떠올라서는 터져 버렸다. 생각의 실마리가 흐트러지고 그것이 현실과 항상 뒤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면 가슴이 갑갑하고 누웠던 자리까지 배기는 듯이 편안치 않았다. 그만 벌떡 일어났다. 일어났으나 또한 별수 없었다.

바깥날이 흐리니 방안은 어두컴컴하여 침울한 기분을 한껏 돋우었다. 비는 개었는지 밖은 고요하였다. 나는 책상 위에 손을 얹고, 멀거니 앉아서 창문만 보고 있었다.

"나리!"

나지막한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최서해(崔曙海: 1901-1932)

함북 성진 출생. 본명은 학송(鶴松). 성진 보통 학교 5학년 중퇴. 그 후 막노동과 날품팔이 등 하층민의 생활을 몸소 겪음. 1924년 <조선문단>에 <고국(故國)>의 추천으로 등단. <카프> 맹원으로 활동. <중외일보>, <매일신보> 기자 역임. 그는 초기 작품에서 빈궁한 하층민의 삶을 그려내는 계급적인 작가로 활동하였으나, 그 후 시대 의식과 역사 의식을 실감 있게 다루면서 현실성과 낭만성을 다양하게 수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품으로는 <토혈>,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탈출기>,<금붕어>, <그믐밤>, <홍염>, <수난>, <무명초>, <호외 시대>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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