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십대손이다. 조부 이재만이 흥성대원군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대원군의 종친 우대 정책으로 가세가 불어났는데 1883년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조부도 처형되었다. 어려서 한문공부를 하여 진사 시험에 합격했으나 신학문에도 관심을 두었다. 그의 작품 활동은 1906년 잡지 <소년한반도>에 한문 현토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주로 양반 가정 여인들의 폐쇄적인 생활을 해방시키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1907년 이종일, 양기탁, 이준 주시경 등과 함께 '광무사(光武社)'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애국계몽 운동에 투신하였다. 구한말 대표적 민족 언론인 '제국신문'에 입사하였으며 애국 계몽 단체인 '대한협회'의 교육부 사무장과 평의원을 역임하였다. 1908년 기호학교 교감을 지냈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재직하였으며 1913년 이후에는 일체의 사회활동에서 은퇴하여 지냈다. 1927년 포천 향리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문학은 1910년을 분기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1910년 이전의 작품인《빈상설》,《홍도화(상)》, 《구마검》, 《자유종》 등은 어느 정도 근대소설로의 진일보를 보여준 귀중한 업적들이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강점 이후에 발표한 《화의 혈》, 《춘외춘》, 《탄금대》 등은 신파적이고 통속적인 것이었으며 구소설로 후퇴하는 양상을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그의 소설은 고전소설의 구조적 특징과 이념형 인간들을 계승하는 동시에 정치적 개혁의식, 신교육, 여권신장 등의 근대적 계몽의식을 담고 있다.
이해조(李海朝, 1869년 2월 27일 ∼1927년 5월 11일)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소설가이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 필명으로는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가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신소설의 창시자로 불린다. 《제국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보》에 소설을 연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