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잡은 것은 확실히 유쾌한 사실이었으나,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슬픈 사실이었다.
그러나, 슬픈 사실은 줄은 알면서도 노예의 사슬에 얼킨 몸을 구태여 벗어나 자기는 자꾸만 미련이 발목을 붙든다.
그것도 애초에 돈 그 물건을 위하여 돈을 잡자던 계획이었다면 모르되, 생명과 같이할 한낱 사업의 자금으로 많이도 말고 꼭 만 원만 잡자고 체면에도 양심에도 다 눈을 감고 의지까지 희생하여 불면불휴 삼십대의 청춘을 썩임으로 기어이 손안에 넣은 그러한 돈이다.
그런데 그것도 인젠 만 원을 훨씬 넘어 이만 원에까지 가까웠건만 돈이 손안에 들어오므로 돈에 대한 욕망은 그만치 커가고, 욕망이 커 가느니만치 마음속을 먹는 벌레는 차츰 깊이 파고 들어가, 돈에 대한 욕망을 깨끗이 씻어 버리자고 하면 뒤미처 돈에 대한 욕망의 검은 소이 양심을 덮어누른다.
오늘은 기어이 한군에게 회답을 써야 할 텐데 정암은 아직도 그 회답할 문구에 이렇다 마음을 꽉 정할 수 없다.
정치나 이념을 자제하고 또한 계몽적이지 않은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수안(送安)이고 아호(雅號)는 우서(雨西)이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의 1남 3녀 중 첫째로 출생하였다. 계용묵 그의 할아버지인 계창전(桂昌琠)은 조선 말기에 참봉을 지냈다. 아울러 계용묵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3명 있었다.
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할아버지 계창전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끌려갔다. 성인이 된 뒤 그는 청년기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 도요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기도 했다.
1920년 《새소리》이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고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27년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본격 소설가 등단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약 10여년 가까이 절필하였다. 한때 그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1942년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상아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