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이면 끝을 내던 이 굵은 넉새 삼베 한필을 나흘째나 짜는데도 끝은 안 났다. 오늘까지 끝을 못 내면 메밀알 같은 그 시어미의 혀끝이 또 오장육부까지 한바탕 할쿼낼 것을 모름이 아니다. 손에 붙지 않는 베라 하는 수가 없다.
박씨는 몇 번이나 이래서는 안되겠다 마음을 새려먹고 놓았다가는 다시 북을 들어들고 쨍쨍 놓고 쨍쨍 분주히 짜보나 북 속에 잠긴 실은 풀려만 가는데도 가슴에 얽힌 원한은 맺혀만 가 그만 저도 모르게 북을 놓고는 멍하니 설움에 잠기게 되는 것이다.
생각하면 참 눈에서 피가 쏟아지는 듯하였다. 하기야 애를 못 낳는 죄가 자기에게 있다고는 하지만 남편까지 이렇게도 정을 뗄 줄은 참으로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도 섬겨오던 남편이었던고? 돌아보면 그게 벌써 십 년 전 - 시집이라고 와보니 남편이란 것은 코 간수도 할 줄 몰라서 시퍼런 콧덩이를 입에다 한입 물고 훌쩍이지를 않나, 대님을 바로 칠 줄 몰라서 아침 한동안을 외로 넘겼다 바로 넘겼다 - 남이 볼까 창피하여 시부모의 눈을 피해가며 짬짬이 코를 닦아주고 아침마다 대님을 혀까지 주어 자식같이 길러낸 남편이요. 그날 그날의 끼니에 쫓아 군색하여 먹기보다 굶기를 더 잘하는 가난한 살림살이를 어린 몸이 혼자 맡아가지고 삯김, 삯베, 생선자백이는 몇 해나였으며, 심지어는 엿광주리까지 이어, 그래도 남의 집에 쌀꾸러는 아니 다니게 만들어 신세를 고쳐놓은 것이 결코 죄될 일은 없으련만 이건 다자꾸 애를 못 낳는다고 시어미는 이리도 구박이요. 남편은 이리도 정을 떼는 것이다.
정치나 이념을 자제하고 또한 계몽적이지 않은 순수 문학을 지향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이며 본관은 수안(送安)이고 아호(雅號)는 우서(雨西)이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의 대지주 집안에서 아버지 계항교(桂恒敎)의 1남 3녀 중 첫째로 출생하였다. 계용묵 그의 할아버지인 계창전(桂昌琠)은 조선 말기에 참봉을 지냈다. 아울러 계용묵에게는 이복 여동생이 3명 있었다.
삼봉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상경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다녔지만, 할아버지 계창전에 의해 강제로 고향으로 끌려갔다. 성인이 된 뒤 그는 청년기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 도요 대학교 철학과를 다니기도 했다.
1920년 《새소리》이라는 소년 잡지에 《글방이 깨어져》라는 습작 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 첫 등단하였고 1925년 《생장》이라는 잡지에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라는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1927년 《상환》을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본격 소설가 등단하였다. 《최서방》, 《인두지주》 등 현실적이고 경향적인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이후 약 10여년 가까이 절필하였다. 한때 그는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5년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백치 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1942년 수필가로도 등단하였다.
비교적 작품을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묘사가 정교하여 단편 소설에서는 압축된 정교미를 잘 보여주었다. 대표작으로 《병풍 속에 그린 닭》,《상아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