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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서전 (한국문학전집 356)

우리 집은 삼각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어떤 농촌이다. 지금 내 눈에 조선이라는 것이 한 점으로 밖에 아니 보이기 때문 에 무슨 도, 무슨 군이라고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요, 내게 관계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내 자서전을 읽는 여러분은, 제목에는 「그」라고 하고 본 문에는 내라고 하는 이 사람이 당신네 동네, 당신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그만일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란 어느 곳에를 가거나 대개 비슷한 것이니까 내 생활이 곧 당 신의 생활이 아닐까. 이것이 실례되는 말이면 용서 하라. 조선 사람의 조상들이 다 그러하였던 모양으로, 내 조상도 뒤에 산 있고 ..
우리 집은 삼각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어떤 농촌이다. 지금 내 눈에 조선이라는 것이 한 점으로 밖에 아니 보이기 때문 에 무슨 도, 무슨 군이라고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요, 내게 관계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내 자서전을 읽는 여러분은, 제목에는 「그」라고 하고 본 문에는 내라고 하는 이 사람이 당신네 동네, 당신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그만일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란 어느 곳에를 가거나 대개 비슷한 것이니까 내 생활이 곧 당 신의 생활이 아닐까. 이것이 실례되는 말이면 용서 하라.

조선 사람의 조상들이 다 그러하였던 모양으로, 내 조상도 뒤에 산 있고 앞에 갈아 먹을 들이 있고 개천이 있고, 그리 고 사방이 폭 싸인 곳에다가 터를 잡았었다. 그리고 뒷산에 는 선영이 있고 솔밭이 있고 밤나무가 있고, 울안과 집 근 처에는 사오 명절과 제사에 쓰기 위한 배나무, 대추나무, 앵 두나무며 아이들이 먹기 위한 살구나무, 복숭아나무가 있었 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집도 그러한 집이었다.
이광수(李光洙, 일본식 이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1892년 3월 4일 평안북도 정주군 ~ 1950년 10월 25일)는 조선,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작가, 시인, 문학평론가, 페미니즘 운동가, 언론인이었으며, 조선왕가의 방계혈족, 사상가, 기자, 번역가, 자유주의 운동가이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참여, 신한청년당,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와 독립신문 등을 맡기도 했었다. 유교적 봉건 도덕, 윤리관을 비판하였고, 여성 해방과 자유 연애론을 주장했다. 언론 활동으로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조선일보 부사장을 지냈고 또한 번역가로도 활동하여 영미권의 작품을 한글로 번안하여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다.

1909년 첫 작품 사랑인가를 발표한 이후 일본 유학 중에 소설과 시, 논설 등을 발표하였고,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망명, 1919년 도쿄(東京)의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 선언을 주도했으며, 2·8 독립 선언서를 기초한 후 3·1 운동 전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했다. 1921년 귀국 후에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 칼럼과 장·단편 소설, 시 등을 발표하였다.

안창호, 윤치호, 김성수 등의 감화를 받아 민족 개조론과 실력 양성론을 제창하였으며, 1922년 흥사단의 전위조직인 수양동맹회를 조직하고, 안창호를 도와 흥사단 국내 조직과 수양동우회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하여, 친일파로 변절한 이후에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규탄받았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는 민족성, 인간성의 개조를 주장하였고 한때 나치즘 등에도 공감하기도 했다. 그는 안창호, 윤치호의 사상적 계승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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